'승격 걸린 한판' 냉정한 승부도 못 막은 '22년 뜨거운 우정'
[경향신문]
K리그2 승격 플레이오프 경기 전날 만나 차 마시는 모습 ‘이례적’
“서로 최선을 다하면 거리낄 이유가 없어…우리에겐 우정도 중요”
김 감독 ‘체력·훈련’, 설 감독 ‘믿고 맡기기’…합숙 폐지는 공통점
“굳이 숨길 일은 아닌데….”
설기현 경남FC 감독(41)은 옆자리에 앉은 ‘형님’을 바라보며 웃었다. 한 달 전 K리그2 플레이오프에서 적장이었던 김도균 수원FC 감독(43)과의 ‘비밀 회담’이 드러난 것이 어딘가 멋쩍은 눈치였다.
두 감독이 경기 전날 수원의 한 호텔 로비에서 만나 차 한 잔을 마신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보통 중요한 경기를 앞둔 감독이라면 친한 사이라도 상대팀 관계자일 경우 거리를 둔다. 더구나 1부리그 승격을 좌우하는 경기라면 그 긴장감은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라운드에서 대표적인 ‘브로맨스’(남자들끼리 갖는 우정)를 자랑하는 둘은 그런 통념을 의식하지 않았다.
김도균 감독과 설기현 감독은 지난 20일 부산 해운대의 한 레스토랑에서 기자와 함께 만나 “한 해의 마지막 경기라 감출 정보도 없었다. 서로 최선을 다하자면서 승자를 축하해주자는 약속이 기억난다”며 “옛날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우리는 우정도 중요하다”며 서로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패자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패자가 나온 날이었다. 설 감독의 경남은 1-0으로 앞서가던 이날 후반 종료 직전 김 감독의 수원에 페널티킥을 내줬다. 주심이 비디오 판독까지 하면서 잡아낸 장면이었다. 결국, 수원 골잡이 안병준의 페널티킥 동점골이 터졌다. 결과는 1-1 무승부였지만 정규리그 순위로 우선권이 있는 2위 수원이 3위 경남을 밀어내고 1부리그로 올라갔다. 경남은 승격 기회를 눈앞에서 놓쳤다.
경남 입장에서는 납득이 어려운 판정일 수 있었다. 그런데 설 감독은 심판 판정을 인정하고 승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김 감독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몰아친 상대를 인정했다. 당시를 떠올린 김 감독은 “경기 내용에서 진 우리가 올라간 것에 미안함이 컸다”며 “설 감독이 승복해준 게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설 감독은 “반대로 내가 이겼어도 (김)도균 형이 똑같이 인정했을 것”이라면서 “사실 나도 참지 못하고 벤치에 가는 길에 물병 몇 개를 걷어차기는 했다”고 털어놨다.
둘은 1998년 겨울 울산에서 나란히 시드니 올림픽 상비군에 이름을 올리면서 처음 만났다. 당시만 해도 김 감독은 세련된 플레이로 각광을 받던 미드필더로 모든 유망주들의 우상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설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사실 난 강원도 촌놈이라 아는 선수가 별로 없었다. 축구 선수로 성공도 장담할 수 없던 시절에 의지하던 상대가 도균이 형”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 감독은 “그때부터 미래의 지도자 꿈을 이야기했다”며 “올해 내가 수원을 맡지 않았으면 설 감독이 맡고 있는 경남의 수석코치로 갈 수도 있었다. 우리 둘이 이렇게 1부리그 승격을 두고 적으로 만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착한 꼰대’와 자율축구
현역시절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린 둘은 선수들에게 ‘프로다운 자세’만큼은 양보하지 않는다. 다만 스타일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뛰는 축구’를 추구하는 김 감독은 자신의 축구철학과 팀이 나아갈 방향을 선수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목표의식을 심었다. 지난해 12월 태국 전지훈련에서 계속된 고강도 체력 훈련에도 선수단 전원이 큰 문제없이 훈련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다. 김 감독이 “내가 선수였을 때는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훈련 강도였다”고 하자, 설 감독은 “그게 요즈음 표현으로 ‘라떼는 말이야~’라는 거다”라고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선수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착한 꼰대’라 불린다”고 귀띔했다.
설 감독은 프로처럼 믿고 맡기는 ‘방임주의’ 리더십이다. 설 감독은 “30대 선수가 많은 우리 팀이라 가능한 것이겠지만 선수를 믿어야 결과도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 원칙”이라고 말했다.
올해 처음 지휘봉을 잡은 두 초보 감독은 프로축구에 남아 있던 합숙 문화를 깼다. 경남과 수원의 홈경기 때는 선수들이 집에서 출퇴근하는 게 일상이 됐다. 설 감독은 “솔직히 내가 선수 시절에 성적이 안 나오면 합숙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머리를 잘랐다. 그런다고 성적이 나오지 않는 걸 알기에 바로 합숙을 폐지했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사실 지난해까지 숙소가 있었는데 내가 부임하면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젊은 감독들이 대세가 되면 이런 게 하나의 추세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다음 시즌으로
김 감독이 이끄는 수원FC는 2부리그 10개 구단에서 연봉 총액(약 39억원)이 중간 수준인 5위에 그쳤지만 승격에 성공했다. 경남의 설 감독도 투자(전체 2위·약 69억원)에 걸맞은 성적(3위)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설 감독은 “도균 형이 추구하는 축구는 팀 전체가 하나로 똘똘 뭉치는 축구”라면서 “그 예산으로 저렇게 밸런스가 좋은 팀을 만든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칭찬했다. 김 감독은 “설 감독도 처음엔 공격 숫자를 늘리는 형태의 축구가 자리를 못 잡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더라. 정말 공격 횟수에선 2부리그 최고였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두 감독은 이제 2021년을 바라본다. 수원은 1부리그에서 생존을 다퉈야 한다. 김 감독은 “올해 지도한 선수 가운데 20명 이상이 바뀐다. 안병준과 마사 같은 핵심 전력도 떠나기에 험난한 길”이라고 말했다. 설 감독은 “그래도 김 감독이 1부에서 잘해줘야 우리를 제치고 올라간 보람이 있지 않느냐. 어렵다고 말하지만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덕담을 남겼다.
경남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즐비한 김천 상무와 부산 아이파크의 강등으로 어느 때보다 치열해진 2부 승격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설 감독은 “구단주(김경수 도지사)의 애정 덕에 어느 정도 전력은 보강을 마쳤다. 내후년에는 도균 형과 1부리그에서 다시 적으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 |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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