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고뇌 속 나온 '벽수산장'.. 정직한 작가 될 것"

김용출 2020. 12. 30.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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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유산' 펴낸 소설가 심윤경
1960년대 옥인동 대저택 배경
친일파 딸의 부조리 바라보는
독립운동가 후손의 고뇌 그려
사회·역사로 작품 세계 확장
5년간 '글쓰기 조울증' 겪기도
"여전히 두렵지만 계속 쓸 것"
“소설을 쓰겠다고 하고서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제가 자신이 없었거나 아니면 시야를 이만큼 확장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나 도덕 윤리, 거대 서사로 확장하는 것에 거부감도 있었거든요.”

친일파의 대저택 ‘벽수산장’을 모티브로 한 신작 ‘영원한 유산’(문학동네·사진)이 작품 세계를 사회와 역사로 확장한 것 같다고 평하자, 소설가 심윤경은 묻어뒀던 산고를 토로했다. 그를 한계까지 내몬, 8년의 그것이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세상에 향한 질문이 하나둘 쌓여 가면서 그 질문과 ‘벽수산장’을 연결할 고리를 찾아낸 것이죠. 세상과 저의 관계를 생각하고, 용기를 내야 하는 그런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2012년 어느 날,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보다가 사진 속 희미한 건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뾰족한 유럽식 탑과 톱니모양 테두리를 두른 창문이 인상적인 건축물이었다. 며칠 뒤 사진을 보여주자 아버지가 말했다. “언커크잖아.” ‘언커크(UNCURK)’는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의 줄임말이었고, 건물은 언커크가 사무실로 쓰던 벽수산장이었다. 벽수산장을 지은 이는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 이름은 그의 아호를 따온 것이었다. 벽수산장은 1966년 식목일에 불탔고, 몇 년간 폐허로 방치되다가 1973년 봄 철거돼 사라졌다.

장편 ‘영원한 유산’은 사라지고 잊혀진 존재인 벽수산장에 대한 8년간의 궁리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배경은 1966년, 서울 옥인동 벽수산장. 유엔 산하 언커크에서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의 아들 해동은 통역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달러로 월급을 받으며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해동 앞에 어느 날 윤덕영의 막내딸 원섭이 나타난다. 수완 좋고 눈치 빠른 원섭은 ‘문화복원 디렉터’로 언커크에 합류해 예산까지 주무른다. 원섭의 뻔뻔한 말을 통역하며 해동의 삶에는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작품은 벽수산장과 언커크를 배경으로 ‘잊힌 것과 존재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묻는다. 가히 자신과 가족→동화→사회와 역사로 확장하는 심윤경 3기를 알리는 천둥 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마스크를 단단히 쓴 그를 지난 24일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코로나19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 작가는 “올해는 송년회 제로의 첫해가 될 것 같다”며 코로나19가 집필에 난관을 던졌다고 말했다. 책 ‘작가의 말’에도 “어느 때보다 많은 취재가 필요했지만,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에 모든 도서관과 궁궐이 문을 닫아버렸다. 취재와 인터뷰가 극도로 위축된 악조건에 좌절”했다고 적었다.
개인적인 우울과 미뤄둔 삶의 질문까지 몰려오면서 한때 ‘글쓰기의 조울증’을 겪었다는 소설가 심윤경은 앞으로 “어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제 이야기가 아닌 것을 쓰고 싶지는 않다“며 “저는 다른 곳에 위치해 있고, 그곳을 정직하게 기록”하겠다고 말했다. 남정탁 기자
”벽수산장이라고 하는 훌륭한 소재를 가지고 8년 정도 궁리하다가 방향을 잡고 막 의욕적으로 하려는 순간, 코로나가 닥쳐왔어요. 공간적인 취재가 중요해 ‘낙선재’를 보고 마지막 왕족의 생활을 감각하고 싶었는데, 닫혀버렸죠. 감각이 제한되고 불안이 엄습해 2개월간 못 쓰겠더라고요.”

작품의 성격상 아무래도 공간과 1960년대의 재현이 관건이었다. 더구나 60년대에 대한 감각이 1972년생인 그에겐 없었다. “(19)50년대는 전후 10년이고 70년대는 복구의 시작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60년대는 분명치 않더라고요. 70년대만 해도 감각이 있지만, 60년대는 그냥 …의 느낌이었죠. 작품을 쓸 때 정서적인 포지션을 굉장히 중시하는 편인데, 그게 비어있었던 거죠. 책과 부모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는 ‘문학의 자장’에서 좀 멀다고 느껴지는 서울대 분자생물학과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친 뒤에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왜 주변의 반대에도 문학판으로 돌진해 들어왔을까.

“(과학계에) 발을 담가봤는데, ‘이과인 줄 알았는데 문과였어요’의 전형적인 케이스였어요. 전 과학책을 좋아했던 거죠. 석사 과정이 끝날 무렵 ‘나의 즐거움은 과학이 아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주변의 반대에도 ‘하면 되지 않겠어’라는 20대 특유의 낙관으로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겁이 없었죠(웃음).”

심 작가는 2002년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고 문단에 데뷔했고, 2004년엔 ‘달의 제단’을 펴내 무영문학상을 받았다. ‘이현의 연애’(2006), ‘서라벌의 사람들’(2008)을 쓴 뒤 동화 ‘은지와 호찬이’ 시리즈를 냈다. 연작 ‘사랑이 달리다’, ‘사랑이 채우다’(2013)를 펴내며 쉼 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에너지를 소진했다”고 토로하는 자신을 마주해야 했다.

“두려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사실 두려움과 싸우고 있고요. ‘내가 작가인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가.’ 환호에서 시작했지만, 제 스스로 확신을 못했습니다. 일종의 ‘글쓰기의 조울증’을 겪었어요. 5년 동안 아무것도 못 쓰겠더라고요. 개인적인 우울의 시기가 찾아오고, 미뤄둔 삶의 질문까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힘든 시간이었지요.”

작가는 6년의 짧지 않은 공백기를 가진 뒤 2019년 ‘설이’로 겨우 넘어섰고, 최근 ‘영원한 유산’을 쓰며 확실하게 돌아왔다. “‘쓸 수 있을까’, 이제는 이런 질문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해요. 쓰는 것 자체가 저에겐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하니까요.”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묻자, 그는 “정직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근대 이즘이나 거대 서사가 아닌, 한 개인이 자식 키우고 먹고 살아가는 욕망까지 기록하는 작품 활동을 했다”며 고 박완서 선생이 롤 모델이라고 고백했다.

“어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제 이야기가 아닌 것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개인의 사악함보다는 소시민으로서의 한계에 정직하려 합니다. 제 자신에 성실하고 정직했다고 평가받고 기록됐으면 좋겠어요.”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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