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체급 세계챔피언 최희용을 KO로 제압한 돌주먹 조동범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조영섭 기자 2020. 12. 2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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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머 국제대회, 올림픽 국가대표 등 한국 복싱계를 대표하는 '돌주먹' 조동범
근성과 체력, 그리고 압도적인 펀치력을 가진 그 남자의 링 위 이야기
85년 월드컵 우승자 오광수와 접전을 벌이는 조동범(우측)

[조영섭의 스포츠 산책] 한때 대중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던 70-80년대 한국 복싱이 세인들의 기억너머 저편으로 스멀스멀 연기처럼 사라지면서 중장년 팬들의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작금의 현실에 90년대를 전후하여 아마복싱 국가대표로 군림하며 한 획을 그은 대표적인 복서중 한명인 조동범이 그의 후배인 김민기와 함께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해 정겨운 담화를 나눴다.

동행한 김민기(한국체대)는 90년 북경아시안게임 LW급 최종결승에서 김시영에게 92년 바로셀로나 LW급 최종결승에선 김재경에게 석패 한후 92년 12월 3체급을 월장했다. 이후에는 미들급으로 대표선발전에 출전 역시 결승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동메달 리스트 이승배에게 4대4 동점에서 종합점수에서 패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 '경기에는 이겼지만 이름값에 패했다'고 생각하며 크게 상심한 그는 이후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과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는다. 반면 이승배(상무)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미들급에서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서는 한 체급 월장해 라이트 헤비급에서 천금 같은 은메달을 획득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김민기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숙명의 라이벌 양석진과 조동범(우측)

조동범은 86년 아시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아마복싱계를 떠난 문성길, 김광선, 김동길, 이해정, 신준섭 등 기존 선수들이 대거 퇴진하고 세대교체가 단행된 한국 아마복싱계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복서였다. 1968년 서울 출생의 조동범은 서울체고 한국체대 상무를 거치면서 87년 템머 국제대회와 88년 2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89년 아시아선수권 92년 한미 국가대항전등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하면서 127전 109승 (67KO.RSC승)18패를 기록하며 명성을 날린 하드펀처였다.

관악구 신림중 2학년인 1982년 체육선생인 이민호 교사가 복싱부를 창단 인근의 덕흥 체육관에서 학생들을 선발 지도하면서 복싱에 입문한 조동범 은 이후 83년 소년체전 39kg급에서 서울대표로 참가 동메달을 획득하였는데 당시 이 체급의 금메달은 부산대표 양석진이었다. 양석진은 후에 조동범의 필생의 라이벌로 통산 4승 2패로 양석진이 우위를 점했는데 경기 내용은 용호상박(龍虎相搏) 난형난제(難兄難弟)의 박빙의 승부였다.

국제대회 4관왕이자 올림픽 대표 조동범

84년 이민호 이흥수 투톱체제로 운영되는 서울체고에 입학한 조동범은 그해 회장배 CORK급에서 우승과 함께 MVP에 선정되며 주목을 받는다. 조동범이 2학년에 진학한 85년의 서울체고 복싱부는 조동범(한국체대)을 위시해서 최현실, 한광형, 정해명(경희대), 김석현, 김범수, 오봉균(동국대), 나학균, 전병성(한국체대), 전경준 최임곤(경희대), 김석호(상무)들이 주축이 되었다. 서울체고 복싱부는 12체급중 5체급을 전후해서 석권하며 79년도 박기철 이남의 성두호 송중석 김종섭(한국체대)등이 버틴 전남체고와 함께 학원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멤버를 구축했다.

특히 조동범은 85년 4월 30일 국가대표 선발전 라이트 플라이급 준결승에서 전국체전 4연패를 달성한 83년 세계청소년 대회(도미니카) 동메달 리스트인 최희용(부산체고ㅡ동아대)을 맞이하여 1.2회전 관록이 묻어난 최희용의 양훅에 다운을 허용하는 등 열세를 면치 못하다가 3회 48초 만에 안면이 오픈된 최희용 에게 섬광(閃光)처럼 터진 라이트일격을 명중 KO시키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반면 3살이나 어린 고교생에게 충격적인 KO패를 당하며 영역(領域)싸움에서 밀린 최희용은 87년 프로에 전향해 2체급에서 세계정상에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87년 3월 한국체대에 입학한 조동범은 체대 3년 선배이자 85년 서울 월드컵과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 86년 세계선수권 동메달 리스트인 간판스타 오광수에게 판정패하며 주춤했지만 이후 첫 출전한 87년 킹스컵 동메달에 이어 템머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관록이 붙은 조동범은 87년 9월9일 태릉선수촌에서 벌어진 88년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오광수와 재대결에서 1회부터 주도권을 잡고 공세를 취하다 라이트일격에 오광수에게 녹다운을 탈취했다.

기선을 제압 한후 2회전에서도 체력이 소진된 오광수가 클린치를 남발하자 한차례 파울 을 얻어내며 5ㅡ0 완승 88 서울 올림픽 출전을 위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 이 경기에서 높은 평점을 받은 그는 87년 대한 복싱협회 최우수 신인복서에 당당히 선정되면서 한국복싱의 미래로 주목을 받는다. 당시 최우수복서는 87년 유고 월드컵(플라이급) 준결승에서 쿠바의 레갈라드와 결승에서 동독의 안드레아스 테브스를 꺾고 우승한 김광선이 차지했다.

올림픽 결단식에서 이흥수 상무감독 조동범 김승미 대표팀 감독(우측)

탄력을 받은 조동범은 올림픽을 앞둔 전초전인 88년3월 제1회 서울컵 대회에 출전했다. 대회에서 그는 87년 유고 월드컵 LF급 금메달 리스트인 불가리아의 폴리코프를 2회 48초 만에 역시 라이트 일격으로 KO승을 거뒀고, 이후 러시아의 대표선수 노오란과 맞대결에서도 3회 2분 36초 RSC승을 거두는 등 국제무대에서도 그의 돌주먹이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강타자 조동범에 맞서  88년 한국체대를 졸업한 오광수가 상무팀의 군무원으로 소속으로 입성 조동범의 서울체고 재학시절 옛 스승인 이흥수 감독의 휘하에서 그의 지도를 받으며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반전 카드를 커내 든다.  결국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한 오광수가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둬 조동범의 올림픽 출전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오광수가 이흥수 감독의 지도를 받아 난적 조동범을 격침 시킨 것은 그야말로 신(神)의 한수였다.

4년 전인 1984년 LA올림픽 선발전에서 전남체고 1년 후배 김용상에게 판정패하며 올림픽출전이 좌절된 오광수가 4년후 에는 한국체대 3년 후배 조동범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88서울 올림픽승선(乘船)에 성공했는데 조동범은 이에 대해 오광수 선배가 올림픽출전에 대한 열망이 자신보다 앞서서 출전하게 된 것 같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한편 절치부심한 조동범은 8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선발전에서 숙적 양석진에 판정승을 거두었다. 어렵사리 출전한 본선에서 세계선수권 동메달 리스트이자 세계랭킹 8위인 북한의 김덕남(평양 체육대)을 제압하며 우승을 차지하며 대회 최우수복서에 선정되며 기염을 토한다. 7년 만에 벌어진 남북대결에서 승리한 조동범은 그간 6승 6패를 기록한 남북대결에서 승리 7승 6패를 기록하는 선봉이 되면서 90년대를 전후해서 태국의 카드포와 사사쿨 필리핀의 벨라스코 북한의 이광식, 김덕남과 더불어 탈(脫)아시아권 복서로 분류되던 특급복서 중 한명이 바로 한국의 조동범이었다.

90년 4월 북경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지독한 감량고에 시달린 조동범은 결국 플라이급으로 월장해 87년 2월14일 대표선발전에서 김광선을 꺾어 파란을 일으킨 한광형(상무)과 남기춘(경희대)를 연달아 잡으며 워밍업을 마쳤다. 그러나 최종 결승전에서 이창환에 판정패 해 주춤했지만 90년 12월 대표선발전에서 김진수(서울시청)을 꺽고 2체급에 걸쳐 국가대표에 발탁된다. 이후 91년 6월 한국체대를 졸업하고 상무에 입대한 조동범은 그해 9월 10일 한 체급을 내려 군산대 강형석과 맞대결 1회와 2회 한차례씩 다운을 시키자 3회에 강형석은 현격한 기량차이를 인정하고 백기를 들어 RSC로 우승하며 전열을 추스린다. 조동범에 패한 강형석은 92년 6월 프로에 전향했는데, 김광선이 2차례 격돌 한차례 다운을 당하는 등 진땀 흘린 끝에 판정승한 필리핀의 세계 랭커 매니 멜초를 일방적으로 난타해 6회 KO승 을 거두며 WBA 세계랭킹 4위에 진입하며 6전 6승(4KO승)을 기록한 가장 유망한 챔피언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바로 그 복서다.

한국체대 3년 선후배 조동범과 김민기(우측)

92년 서울컵에서 전열을 정비하며 국가대표로 출전한 조동범은 필리핀의 벨라스코 에게 12ㅡ11 간발의 차이로 석패한후, 92년 바로셀로나 선발전에서 4년전 88서울 올림픽 선발전에서 한차례 맞대결해 1회1분45초만에 RSC로 잡은 전력이 있는 서울컵 동메달 리스트이자 한미 국가대항전 2연패에 빛나는 김오곤(상무)을 판정으로 잡고 올림픽 본선에 출전한다. 당시 대표팀 명단은 LF급 조동범 (상무), F급 한광형 (상무), Fe급 박덕규(원광대), L급 홍성식(상무), LW급 김재경(동국대), W급 전진철 (상무), LM급최기수(경남대), M급 이승배(상무), LH급 고요다(상무), H급 채성배(광주 동구청), SH급 정승원(한체대)등 총 11체급에 출전한다. 이 대회에서 김승미 감독과 이흥수 코치가 두톱으로 진두지휘한 대표팀은 L급의 홍성식과 M급의 이승배 두 사우스포가 동메달을 획득했는데 비슷한 유형의 사우스포인 LW급 의 김민기가 김재경 대신 출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 대회였다. 왜냐면? 당시 올림픽에 처음 채택된 컴퓨터 채점에서는 장신의 사우스포가 내뻗는 스트레이트가 포인트에 유리한 강점을 지닌 점 때문이다. 단신의 파이터 였던 김재경(동국대)은 올림픽 1회전에서 동독의 안드레아스 슬로에게 12ㅡ0 퍼펙트 게임으로 완패했다.

여담이지만 김승미, 이흥수 두 명장은 성동중앙체육관 선후배로 호흡이 잘 맞았던 콤비로 기억된다. 이들은 88서울 올림픽이 종결되면서 복싱 에이스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89년부터 시작된 복싱의 암흑기(暗黑期)를 잘 추슬려서 공백기를 잘 메운 우수한 지도자란 생각엔 변함이 없다. 이들을 포함해 황철순, 김성일, 곽귀근, 정희조, 정창구, 한정훈, 김왕순, 박봉관 등이 필자가 학원스포츠에 몸담을 때 지켜본 한국 최고의 지도자 10명이란 생각이 든다.

한펀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메달권에서 탈락한 후 조동범은 김광선, 변정일을 스카웃한 화랑 프로모션에서 계약금 1억을 제시하며 영입하기위해 나섰지만 예기치 않은 암초가 등장하면서 순조롭게 프로행이 진행되질 않자 조동범은 곧바로 링을 떠난다. 가장 아쉬워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펀치력과 체력, 그리고 근성으로 무장한 조동범은 한 세대(3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프로복싱에 특화된 좋은 재목이었다. 만일 그가 프로에 전향했다면 최경량급에서 70%에 육박하는 스커드 미사일처럼 터지는 천부적인 강펀치와 강한 근성과 어우러져 프로복싱 한 페이지를 장식할 거물급 복서였기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현재 경기도 광주에 단란한 보금자리를 구성하면서 천재도서 부장으로 변신해 인생 3회전에서 건실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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