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망론' 고건·반기문과 다른 이유
●尹, 고건·반기문 아니라 이회창과 유사
●권력 기획 아니라 권력과 충돌해 자산 축적
●총장직 내려놓는 순간 사법처리 가능성
●추미애 대권 도전하면 대치선 부각
●국회의원부터 해야? 트럼프·마크롱 학습효과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슨 자리에 앉으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기문 씨는 외교부 장관 할 때만 해도 아무 관심도 못 받던 사람인데 유엔 사무총장이라고 하니 대단한 줄 알고서 (사람들이) 지지했던 거지. 그런 식으로 나라의 지도자를 뽑으면 안 된다."
그는 "인기인과 정치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고도 했다.
야인(野人)과 당인(黨人)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 총장을 향해 공세의 고삐를 조이자 상황이 급변했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오마이뉴스 의뢰로 12월 21일부터 24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2041명을 대상으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윤 총장은 23.9%의 지지율을 기록해 1위를 차지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는 18.2%로 공동 2위였다.(이하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차세대가 좀체 눈에 띄지 않는 야권에서 그는 지금으로서 가장 유력한 주자다.
국민의힘에 윤 총장은 양날의 검이다. 정권과 날선 각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의힘과 윤 총장은 이해관계가 통한다. 동시에 국민의힘이 배출한 두 대통령(이명박, 박근혜)에 대한 수사와 구속기소를 주도한 사람도 윤 총장이다. 당 내부에서도 복잡한 셈법이 읽힌다.
국민의힘 핵심관계자는 "윤 총장을 내칠 필요도, 당에 빨리 들어오라고 할 필요도 없다"면서 "김종인 위원장은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를 통해 탄핵 이후 처음으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으면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판이 완전히 바뀔 거다. 그러면 윤 총장에게 낀 거품이 걷히고, 지지율도 조정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장밋빛 시나리오의 바탕에는 전례가 있다. 2017년 대선 국면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구(舊) 여권의 기대주로 급부상했다가 낙마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1위로 치고나갔다가 중도하차한 고건 전 총리의 사례도 있다. 윤 총장의 지지율이 치솟는 현상 역시 한 순간의 바람일 뿐이라는 게 야당의 시각이다. 야인 김종인이 윤 총장과 반 전 총장을 도매금으로 취급했던 까닭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선거와 여론 판세를 읽는 데 능통한 전문가들은 '윤석열의 길'과 '반기문의 길'(혹은 '고건의 길')이 뚜렷이 다르다고 입을 모은다. 1996년 신한국당 공채로 정치에 입문해 대선·총선 등 굵직한 선거의 핵심 실무를 맡아온 장성철 공감과논쟁 정책센터 소장은 "반 전 총장은 권력이 직접 나서서 만들려 했던 후보였다. 권력의지가 외부에서 주입됐다"면서 "윤 총장은 스스로 투쟁해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반 전 총장과는)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최진 대통령리더십 연구원 원장은 "반 전 총장은 정치력과 배짱 등 정치인으로서의 내공이 부족해 낙마했다. 공직자 출신들은 대부분 내공 부족에 시달렸는데, 윤 총장 역시 정치인으로서의 내공은 검증된 바 없다"면서도 "공직자로서의 내공은 상당해 보인다"고 했다.
이회창의 길과 윤석열의 길
1991년 이후 대선을 비롯해 각종 대형 선거를 기획한 경험이 있는 박성민 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는 "이회창과 윤석열은 스스로 (정치적 에너지를) 쟁취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고건 전 총리나 반기문 전 총장은 당시 여권에서 마땅한 후보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검토했던 후보다. 윤 총장은 권력과 충돌하면서 지지를 획득했다는 면에서 김영삼 정권 당시 대통령과 맞서면서 국민적 영웅으로까지 떠오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에 가깝다. 권력과 충돌하면서까지 법과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이회창에게도 있고 윤석열에게도 있다. 그렇게 국민적 신망을 얻으면 정치적 에너지와 동력이 생긴다."
반 전 총장, 고 전 총리에게 열렸던 퇴로가 윤 총장에게는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반 전 총장은 2017년 2월 1일 19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 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에 임명됐다. 고 전 총리 역시 2007년 17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10년을 주기로 평행이론처럼 행보가 닮았다. 두 사람 공히 대선을 치렀다면 맞대결 했을 세력과 협력했다. 경쟁은 했으나 극한 대립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윤 총장은 현직에서 내려오더라도 정치적 파고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 정치적 색채가 옅은 사회 원로의 길을 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여권의 '토끼몰이'가 아이러니하게도 현직 검찰총장을 현실 정치로 떠미는 모양새다.
장성철 소장은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윤 총장은 검찰총장이라는 옷을 벗는 순간 검찰 수사에 직면하고 포토라인에 설 가능성이 높다. 정치를 안 하려 해도 하게 되는 쪽으로 내몰릴 것"이라며 "최근에는 윤 총장 본인도 정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것 같다.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를 지키겠다'고 발언한 것도 정치적 행위로 보인다"고 했다.
피아(彼我)가 명확히 구별되는 대치선이 있다는 점도 윤 총장과 반 전 총장 간 차이점이다. 특히 추미애 장관의 향후 행보는 윤 총장의 행보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추 장관이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면 윤 총장과의 직접적 맞대결은 무산된다. 단, 내후년 대선 출마로 방향을 정하면 경우에 따라 '與 후보 추미애'와 '野 후보 윤석열'이 '추-윤 갈등 2라운드'를 펼칠 수 있다.
강성 친문 지지층 사이에서 추 장관이 대안으로 주목받을수록 대척점에 서 있는 윤 총장도 계속 호출될 수밖에 없다. 최근 시행된 복수의 차기 대선 여론조사에서 추 장관은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에 이어 여권 내 3위 주자로 올라섰다.
비문(非文)으로 분류되는 여당 중진은 "추 장관과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서울시장 당내 경선에서 맞대결할 것처럼 보는 여론이 있는데, 나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추 장관은 법무부 장관을 맡을 때부터 이미 관심이 대선에 가 있었다"고 말했다.
관전 포인트는 '尹 신당' 출현 여부
‘윤석열 불가론'의 또 다른 근거는 이른바 '경험론'이다. '반기문 대망론'이 퍼질 때도 여의도에는 "정치 경험이 없는 인물이 대통령에 바로 당선될 수는 없다"는 말이 격언(格言)처럼 돌았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고민하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김종인 위원장이 "국회의원부터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 건 유명한 일화다. 대통령비서실장 경험이 있던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부산에서 총선에 출마한 적이 있다.최근 미국, 프랑스의 사례를 보면 기류 변화가 감지된다. 2016년 11월 공직 경험이 전혀 없는 부동산 재벌 출신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공화·민주 양당의 주류세력과 모두 불화하는 아웃사이더였다. 2017년 5월 프랑스에서는 좌우파 양당 편입을 거부하고 중도신당을 창당해 선거에 처음 출마한 에마뉘엘 마크롱이 대선에서 승리했다.
트럼프와 마크롱의 성공 모델은 한국정치에 학습효과로 작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윤 총장이 대선 출마를 결심하더라도 당장 국민의힘에 입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내다본다. 윤 총장이 '반여(反與) 비야(非野)' 노선을 상징하는 점도 이와 같은 해석에 무게감을 싣는다.
장성철 소장은 "트럼프나 마크롱처럼 외곽에서 지지율과 경쟁력, 인지도를 끌어올린 뒤 최대한 늦게 국민의힘을 흡수하는 형식을 택해야 한다"면서도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이 (탈당하지 않고) 지지선언을 하면서 윤 총장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친이 충남 공주 출신인 윤 총장의 연고를 이유로 국민의힘 충청권 의원들이 측면 지원하는 역할을 하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충청권 5선인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12월 11일 CBS 라디오에 나와 '윤 총장이 국민의힘에서 대선 출마하는 게 가능하다 보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걸 원하지는 않는다"면서도 "범야권이 생각하는 상황 및 현실 인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윤 총장이 국민의힘에 들어오기보다 제3지대에 머무르며 야권의 확장성을 키우는 게 야권에 득이 되리라는 속내가 읽힌다.
국민의힘에는 '적폐청산 수사'를 주도한 윤 총장에게 여전히 분노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윤 총장이 범야권으로 분류되는 터라 내놓고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윤 총장의 입당은 제1야당 분열이라는 소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남는 시나리오는 후보 단일화뿐이다. 국민의힘 핵심관계자는 "정권교체가 목표라면 윤 총장과 절대 찢어져서 대선을 치를 수는 없다"고 했다.
따라서 윤석열 신당(新黨)의 출현 여부는 최대 관전 포인트다. 분류하자면 '마크롱 모델'이다. 박성민 대표는 "윤 총장이 제3당 후보로 나가기로 결심하면 신당은 만들어진다. 당을 직접 만들어본 경험은 없으니 기성 정치인 중 누군가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정권심판이라는 목적지
대선은 막대한 자금과 조직이 필요한 정치 이벤트다. 검증 과정도 잇달아 넘어야 한다. 반 전 총장이나 고 전 총리가 선거 문턱에도 가보기 전 불출마를 선언한 까닭은 여기 있다.그러나 여러 이유에서 '윤석열의 길'과 '반기문의 길'은 태생적으로 다르다. 윤 총장을 향한 지지는 반문(反文) 정서를 등에 업고 정권심판이라는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 그야말로 기호지세(騎虎之勢·호랑이 등에 탄 모양)다. 설사 후보로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대선 국면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거세질 수밖에 없다.
최진 원장은 "윤 총장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는 등 어떤 형태로건 킹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시나브로 '윤석열 징계위 정국'이 '윤석열 대망론 정국'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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