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한해를 마무리하는 순간들

곽은산 2020. 12. 28.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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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편집국 유리문 앞에서 마주친 여성은 노란 등기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야근 날 회사에 들어가던 참이었는데 출입증을 놓고 와 외부인 출입을 막은 문 앞에 잠시 그와 함께 있었다.

올해 마지막 이발을 하러 가던 그날 영등포동은 무척 추웠다.

그런 내 기분을 모르는지 그날도 미용실 실장님은 정치권 질문을 쏟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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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편집국 유리문 앞에서 마주친 여성은 노란 등기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야근 날 회사에 들어가던 참이었는데 출입증을 놓고 와 외부인 출입을 막은 문 앞에 잠시 그와 함께 있었다. 30대 정도에, 이곳이 처음인 듯 두리번거리던 여성은 이내 편집국과 연결되는 수화기를 들었다. 

“신춘문예 원고를 내러 왔는데요.” 

그러고보니 신춘문예 마감 즈음인 연말이었다. ‘코로나로 회사 들어가기도 번거로워졌네’ 생각하던 참에 잘 됐다 싶어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그때 여성이 봉투를 조심스레 옆구리에 끼더니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살짝 찡그릴 만큼 감은 눈에서 그제서야 간절한 표정이 보였다. 그 기도를 보며 ‘오래도록 꿈꿨을 신년 등단을 위해 1년간 진심을 다했겠구나’, 잠시나마 생각했다. 

진심을 다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사람도, 벌써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며칠 전 주말을 맞아 집에서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데 반가운 이름이 휴대폰 화면을 가렸다.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은산아 나 합격했어.” 
곽은산 정치부 기자
재작년까지 대학 언론사입사준비반에서 함께 공부한 형은 나보다 글을 잘 썼다. 기자 되는 건 시간문제 같았지만 최종면접만 가면 고꾸라졌다. 올해는 코로나로 공채 기근이었다는데 언제부턴가 안부 묻기도 어려워졌다. 그랬던 형이 허허 웃으며 몇 년의 수험생활에 힘들었던 내색 없이 기뻐하니 나도 덩달아 좋았다. “주52시간제라 경찰서에서 자는 수습기자 생활을 못해보게 돼서 아쉽다”는 의욕 넘치는 형의 발언엔 “그럼 그냥 경찰서에서 자면 된다”고 이젠 나도 편하게 농담을 했다. 새로운 시작의 설렘은 지켜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든다. 

올해 마지막 이발을 하러 가던 그날 영등포동은 무척 추웠다. 국회 기자실 앞에서 영등포역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놓쳐 30분을 그냥 걸었다. 일로 스트레스가 가득 찬 날엔 무작정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내 기분을 모르는지 그날도 미용실 실장님은 정치권 질문을 쏟아내셨다. “서울시장 선거엔 누가 나갈까요?”, “검찰총장이 정치를 할까요?” 일이 좋아 매일 1등으로 출근한다는 실장님은 세상 소식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침마다 신문을 본다고 하셨다. 이곳에 다니는 타사 기자에게서 내 직업을 알게 되신 뒤론 늘 호기심이 한가득이다. 그날은 내가 피곤해 보인다며 거기서 그치셨지만. 

미용실을 나와서 친구와 만나 근처 순대국집에 갔는데 우연히 퇴근 후 같은 곳을 찾은 실장님을 마주쳤다. 간단히 인사를 한 뒤 밥을 먹고 계산을 하려 했다. “키 큰 남자분이 전부 계산하고 가셨어요.”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거리두기 3단계 문턱에 있는 미용실 실장님에게 받은 선물이 올 연말을 추억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코로나로 힘든 한 해였지만 다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했고 때론 격려를 보냈다. 그렇게 한 해 끝에서 누군가는 새해에도 찾을 단골 미용실을 정했고, 누군가는 취직에 성공했으며, 또 누군가는 곧 꿈을 이뤄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선한 삶의 에너지가 새해에도 꿋꿋이 이어졌으면. 백신 공급이다 뭐다 더 힘들어질지 모른다는데, 연말 즈음 ‘그래도 잘 버텨냈지’ 돌아보게 할 진심어린 추억 하나씩은 남길 수 있게 말이다.

곽은산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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