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자사고 취소는 위법" 첫 판결

곽수근 기자 2020. 12. 19.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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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기준 변경 등 절차상 부당" 文대통령 대선 공약에 제동
자사고 지정이 취소된 부산 해운대고 학부모들이 지난 7월 29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자사고 지정 취소 결정에 대해 부동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뉴시스

부산 해운대고가 지난해 8월 자율형 사립고(자사고) 지정 취소 처분에 불복해 제기한 1심 행정소송에서 승소했다. 전국 자사고 10곳이 교육청의 지정 취소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 가운데 첫 판결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인 자사고 폐지를 위해 교육 당국이 평가 지표를 자의적으로 바꾸는 등 무리한 ‘자사고 죽이기’에 제동이 걸리면서, 해운대고 외 다른 자사고 9곳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부산지방법원 제2행정부(부장 최윤성)는 18일 해운대고 학교법인 동해학원이 부산시교육청을 상대로 낸 자사고 지정 취소 처분 무효 확인 등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부산시교육청이 해운대고와 협의 없이 신설하거나 변경한 평가 기준과 평가 지표는 해운대고에 현저하게 불리한 것”이라며 “부산시교육청이 재량권을 남용했기 때문에 위법하다”고 밝혔다. 앞서 부산시교육청은 지난해 자사고 재지정 평가를 하면서 기존 60점이던 재지정 기준 점수를 70점으로 올리고, 감사 등 지적 사례에 따른 최대 감점을 3점에서 12점으로 네 배나 올리면서도 해운대고와는 협의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렇게 변경한 기준 점수와 평가 기준을 2018년 12월 31일에 학교에 통보하고, 2015~2019년 운영 성과에 소급 적용했다. 이에 따라 해운대고는 기준 점수(70점)에 못 미치는 54.5점을 받아 자사고 지정이 취소됐다. 재판부는 “해운대고에 불리하게 변경되거나 신설된 기준 점수와 최대 감점 한도 등에 관한 평가 지표가 소급 적용되지 않았다면 최소한 63.5점을 받아 변경 전 기준 점수 60점을 충족해 자사고 지정 기간을 연장받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부산시교육청은 항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서울 자사고들 “시교육청 취소도 위법”

이번 판결은 다른 자사고 9곳의 소송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해 서울시교육청이 지정 취소한 경희고·배재고·세화고·숭문고·신일고·이대부고·중앙고·한대부고 등 자사고 8곳과, 경기도교육청이 자사고 지정을 취소한 안산동산고가 해당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1심 판결은 내년 초에 나올 전망이다. 이 학교들은 지난해 자사고 지정 취소 처분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법원이 받아들여 본안 판결 때까지 자사고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4곳은 지난해 말 신입생 지원자가 모집 정원에 미달하는 등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7월 21일 오후 서울 지역 자율형 사립고 학생과 학부모 3000여 명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서울시교육청의 자사고 지정 취소에 항의하고 있다. 자사고 지위를 잃고 교육 당국과 소송 중인 학교는 전국에 모두 10곳이다. 이 중 부산 해운대고에 대해 18일 법원은 자사고 지정 취소 처분을 취소했다. /장련성 기자

앞서 교육부와 11개 시·도교육청은 자사고 평가 지표 표준안을 공동 개발해 재지정 기준 점수를 60점에서 70점으로 높이고, 지표도 자사고에 불리하게 만들어 소급 적용하는 평가를 강행했다. 그 결과 서울시에 있는 자사고 13곳 중 8곳이 총점 70점에 미달해 자사고 지정이 취소됐다. 그러면서도 시교육청은 각 어떤 지표에서 어떤 항목이 부족해 떨어졌는지 등 평가 근거와 결과의 구체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다. ‘깜깜이 평가’였던 셈이다. 교육계에선 부산시교육청의 자사고 취소 처분을 재량권 남용이라고 판결한 부산법원의 판단이 서울시교육청 등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2025년 자사고 일괄 폐지

하지만 지정 취소된 자사고들이 해운대고처럼 잇따라 승소해도 2025년부터는 일반고로 일괄 전환될 전망이다. 자사고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국정 과제로 추진해온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1월 자사고·외고·국제고를 2025년에 모두 일반고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초등학교 5학년이 고교에 진학하는 해에 자사고·외고·국제고가 사라지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초중등교육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올 2월 개정해 자사고·외고·국제고의 근거 규정을 모두 삭제했다.

교육부는 2025년 자사고 폐지를 이유로 들어 올해에는 자사고 등 재지정 평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2025년에 일반고로 전환되니 올해 재지정 평가가 의미 없다는 것이다. 조규철 안산동산고 교장은 “내년 1심에서 이길 것이라는 기대가 있지만 2025년에는 일반고로 전환시킨다니 불안하다”며 “학교가 자사고를 신청했던 이유는 국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렇게 불공정하게 평가하고 탈락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김철경 서울 대광고 교장은 “자사고 폐지로 교육 현장에는 갈등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며 “정부의 자사고 폐지 방침 등 영향으로 자사고 신입생 경쟁률도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교육계에서는 차기 정부에서 자사고를 다시 살리지 않는 한 2025년 일반고 일괄 전환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국민의힘에서 자사고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통과는 어려운 상황이다. 김경회 성신여대 교수는 “자사고 폐지는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정치가 개입해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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