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탄희의 격정 토로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개혁 배신했다"
이탄희. 1978년생. 11년 동안 판사였고, 잠시 변호사였다가, 지금은 국회의원이다. 그리고 아마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가장 성공한 내부고발자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을 세상에 드러냈다. 2017년 2월, 법원에서도 다들 부러워하는 출셋길에 갓 올라탄 이 젊은 판사가 난데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 사표가 불러온 폭풍에, 철옹성 같던 양승태 대법원이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양승태 대법원은 진행 중인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부끄러운 이름을 남겼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보기 드문 내부고발의 해피엔딩 이야기로 보였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올해 내내 아팠다. 4월에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공황 증상을 고백하고 의정활동을 중단했다. 몇 번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그는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럴 때 그는 “숯덩이를 삼킨 것 같다. 숨도 내쉬기가 어렵다”라고 말하곤 했다. 띄엄띄엄 속내를 내비치던 그가 결단을 했다. 12월1일 기자와 만난 그는 4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것은 놀랍도록 성공한 내부고발자의 놀라운 좌절 이야기다. “후회하는 장면이 있나?” “딱 하나 후회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개혁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좀 더 빨리 알아차려야 했다.”
“사법농단 실체는 직업윤리 위반”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임기를 시작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1차 조사로 빙산의 일각만 드러난 사법농단 실체를 조사하는 게 당면 과제였다. 김명수 대법원은 2차와 3차 조사위원회를 연달아 꾸려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3차 조사에서는 재판 개입과 재판 거래 의혹, 판사 뒷조사 의혹이 제기될 만한 법원행정처 문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2018년 5월 상황이다(〈시사IN〉 제561호 “양승태 대법원의 ‘거래의 기술’” 기사 참조). 문건 공개만으로는 부족했다. 재판 개입, 재판 거래, 판사 뒷조사가 실제로 얼마나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걸 누가 지시했는지 밝혀야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장고 끝에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형사 절차를 시작한 게 올바른 판단이었는지는 당시에도 논쟁이 많았다. 사법농단은 명백히 헌법에 반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게 형사법정에서 유죄가 나올 사건인지는 좀 다른 문제다. ‘헌법에는 반하지만 무죄’는 얼마든지 가능한 결론이었고, 이후 법원 판결도 그렇게 나오고 있다. 사법농단 사건의 주요 등장인물인 임성근 판사는 올해 2월 1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재판부는 임 판사의 행동이 ‘반헌법적인 행위’라고 보면서도 형사범죄로 보지는 않았다. “판사들이 그걸 모르고 검찰 수사를 주장했을 리는 없지 않겠나. 검찰로 간 이유를 잘 봐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입장은, 이 사건의 본질은 직업윤리 위반이라는 거였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판사 시절 입장도 정확히 그랬다. 직업윤리 위반에 상응하는 대응은 징계다.” 검찰 수사라는 선택지는, 사법농단 사건을 형사처벌로 마무리하려고 등장한 게 아니었다. 정확한 징계를 하려면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검찰 수사는, 그 실체 규명이 법원 내부 절차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집어든 선택지였다. 2019년 1월, 검찰이 수사를 마치고 주요 피의자들을 기소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구속됐다. 사법부 수장 출신이 구속된 것도 헌정 사상 최초다. 형사절차가 개시되었으니 여론의 시선은 모두 유죄냐 무죄냐로 쏠렸지만, 이탄희에게는 더 중요한 줄기가 있었다. 2019년 3월, 검찰은 현직 판사 66명의 사법농단 연루 사실(‘비위 사실’)을 지목해 법원에 통보한다.
양승태가 아니라 김명수 대법원이 꺾었다
2019년 5월, 김명수 대법원은 66명 중 10명만 징계를 청구한다. 연루된 판사 대부분이 면죄부를 받았다. 이 소식은 법원을 떠나 공익변호사로 일하던 이탄희를 충격에 빠트렸다. 사건은 복잡했지만 원리는 간명했다. 직업윤리를 위반한 판사는 징계를 받아야 하고, 특히 반(反)헌법적인 위반일수록 징계는 무거워야 한다. 그래야 헌법에 반하는 직무윤리 위반이 재발하지 않는다. 초등학생도 바로 이해할 간단한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형사법정은 직무윤리 위반을 처벌하지 않는데, 이 사건은 바로 그 직무윤리 위반이 핵심이다. 각자의 직무윤리 위반에 걸맞은 징계로 마무리되는 게 가장 질서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 징계가 꺾였다. 양승태 대법원이 아니라, 김명수 대법원이 꺾었다.
넉 달 전인 2019년 1월에 판사 이탄희가 두 번째 사표를 냈을 때, 김명수 대법원장이 그를 불렀다. 이날 대법원장과 했던 대화가, 징계가 꺾인 5월 이후 자주 떠올랐다. “사직을 말리다가 내가 듣지 않으니 대법원장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법원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해라.’ 그 말이 굉장히 오래 기억에 남더라…. 이유를 곧바로 안 건 아닌데, 뭔가 계속 마음에 안 들었다.” 이탄희는 공정한 재판, 헌법가치를 지키는 법원, 그러지 못한 과거의 문제를 드러내는 진실 등등 일련의 가치들을 지키려고 희생했다고 생각했다. “법원을 지킨다”라는 말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달랐다. 그 말은 법원이 수호하는 가치가 아니라 법원 그 자체를 보호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법원에 속한 식구를 보호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대법원장의 말 속에서 이탄희의 내부고발은, 내부의 재판 개입과 외부의 법원 비판으로부터 판사들을 지켜낸 사건, 그를 위해 ‘썩은 일부’를 폭로한 사건으로 미묘하게 의미가 바뀌었다. 이탄희는 ‘출포판(출세를 포기한 판사)’이 아니었다. 그는 법원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고, 내부고발자가 되지 않았어도 성공가도에 있었으며, 심지어 내부고발자로도 결과를 냈다. 그런데도 2019년 1월에 두 번째 사표를 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2017년 첫 사표 이후로 2년 동안 사법농단에 매달리다 보니 내가 이미 판사로 수명이 다했다는 걸 알겠더라. 나는 판사직에 애착이 사라진 게 아니다. 내가 판사로 갖춰야 할 기준을 이제는 못 맞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려놓았다. 대법원장을 만나서도 정확히 말했다. ‘나도 내 욕심 포기하고 나가는 것이다. 당신도 판사다움의 기준을 낮추지 마시라. 사법농단 처리를 온정주의로 하지 마시라’라고 했다. 그런데 그걸 안 지켰지 대법원장이.” 온정주의는 사법농단을 수습할 대법원 수장의 덕목이 아니었다. 그것은 ‘법원 가족’을 지키는 가부장의 덕목이었다. 삶을 건 고발이 망가지는 걸 막아야 했고,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했다. 징계 절차 중에 법원 밖에서 이뤄지는 게 하나 있었다. 가장 무거운 징계인 법관 탄핵은 국회가 한다. 처음에는 직접 국회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사법농단 내부고발자라는 상징성을 보존하려면 국회의원이 되는 건 누가 봐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할 권한이 국회에 있었으니, 거기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심한 이탄희는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와 만날 때도 법관 탄핵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선거 기간에 공황 증상이 찾아왔다. 2017년 첫 사표 때도 나타났던 증상이 재발했는데, 정도가 훨씬 심했다. 온몸이 땀에 젖어 깨는 날이 반복됐다. 2~3시간씩 자면서 선거를 버텼다. 연설이나 대화를 하면서도 정신이 멍하다고 스스로 느끼곤 했다. 2017년과는 달리 이번엔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공황 증상을 공개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증상을 공개하면 유권자들이 돌아설 것이니 국회의원 경력은 끝장이라고 말리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게 왜 ‘끝장’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것도 하나의 직업인데, 더 못 하게 되면 다른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두 달 좀 더 쉬었나? 거의 매일 울었다. 하루는 억울해서 울고, 또 하루는 그냥 화나서 울고. 내가 왜 이런 무게를 다 지고 끌고 가나, 이렇게 살 필요는 없는 건데 내가 왜 이렇게 사나. 상담해주신 선생님이 그러더라. 심리적 자기소멸의 직전 상태가 공황이라고.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소멸하기 직전에 찾아오는 상태라고.” 내부고발자의 해피엔딩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살면서 겪어본 가장 길고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법원개혁의 첫 단추는 법관 탄핵
억울하고 화가 났다. 국회의원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국회의원이 되어서 해야 할 일이 중요했다. 결국은 법원개혁. 그러려면 첫 단추는 법관 탄핵. 그게 김명수 대법원이 흔들어놓은 ‘사법농단 처리의 질서’로 복귀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당을 설득할 논리도 다듬었다. 사법농단의 최종 평가를 형사절차에 맡기는 건 여당에도 부담이다. 이 ‘맞지 않는 칼’은 ‘헌법에 반하지만 무죄’ 결론을 연달아 내고 있다. ‘맞는 칼’인 징계를 대법원이 할 생각이 없으니, 여당이 주도해야 한다. 그래야 여당도 산다. 이 모든 할 일이, 본인이 아파서 기약 없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대법원장이 징계를 안 해도, 탄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안 내도 국회에 있는 사람이 하려면 할 수 있잖아. 그래서 나는 국회의원이 된 거다. 과업을 가운데 놓고 생각해보면 일관된 이야기고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거 하겠다고 완전히 낯선 직업으로 바꿨는데 그 일을 못하니까 억울한 거지. 내가 아파서 못하는 거니까 누굴 탓할 수도 없어서 화가 나는 거고.” 마음이 급했다.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정기국회를 앞두고 국회로 복귀했다.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법원발 뉴스 하나가 다시 그를 무너뜨렸다.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으로 꼽히는 임성근 판사와 이민걸 판사가 연임 신청을 포기했다. 두 판사는 사법농단에서 맡은 역할이 드러나 있고, 직무윤리를 위반한 정도도 무겁다. 이탄희가 탄핵소추 대상으로 내심 점찍어둔 판사가 이 둘이었다. 두 판사가 연임을 포기하면 내년 2월28일자로 퇴직이다. 이탄희는 정치현실을 따져보고 일정을 계산해봤다.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도 탄핵 일정을 퇴직 전으로 맞출 길은 없었다. 이 소식이 나온 날 그는 “숯덩이를 삼킨 것 같다”라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은 법관 탄핵에 대해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취지로 답할 뿐 자체 입장을 내지 않았다. 형식논리로만 보면 맞는 말이다. 탄핵소추는 국회가 하고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한다. 하지만 탄핵은 가장 무거운 징계여서 국회 의결을 거칠 뿐, 본질은 징계다. 탄핵이란 사법농단을 주도한 판사들이 징계 대상이냐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법원이 답을 내놓지 않는다는 걸 납득할 수가 없었다. 김명수 대법원이 침묵하는 동안, 탄핵소추의 유력한 대상이던 두 판사는 ‘안전한 퇴임’을 앞뒀다. 사안의 성격도 드러난 양태도 다르지만, 이탄희에게는 ‘2019년 대법원의 징계 면제’와 ‘2020년 대법원의 탄핵 침묵’이 같은 사건이다. 두 번 다 대법원장은 법원이 수호하는 가치가 아니라 ‘법원 가족’을 지켰다. 내부고발자의 무릎은 또 한 번 크게 꺾였다. 총선 전까지만 해도 대법원장의 입장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국회 의석 분포에서 여당 의석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관 탄핵이나 법원개혁 입법에 의견을 내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은 아닐까? 동의는 못해도 이해는 할 만한 얘기였다. 그런데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뒀는데도 대법원이 달라지지 않았다. 정리가 되고 의심이 사라졌다. “아 이건 기회를 기다리는 침묵이 아니구나, 침묵 그 자체가 본뜻이구나.” 김명수 대법원은 이탄희 의원이 내놓은 사법행정위원회 설치법에 위헌 의견을 냈다. 이탄희안은 법관 인사 등 사법행정을 맡는 사법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법원 외부 위원을 과반수로 한다는 게 핵심이다(〈시사IN〉 제640호 ‘법원 검찰 바로잡을 이탄희의 제언’ 기사 참조). 헌법 제101조 1항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정하는데, 사법행정위원회에 외부인이 과반수면 사법권이 법원 밖으로 넘어가는 것이므로 위헌이라는 게 대법원 논리다. “그런데 대법원의 원래 입장이 그렇지 않았나? 대법원이 반대할 거라고 생각을 안 했나?” “했다. 그러나 위헌 의견은 상상도 못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사법행정권은 행정권이다. 이것까지 사법권이라고 억지를 쓴 기존 대법원 논리를, 김명수 대법원이 그대로 가져왔다. 판사 시절의 김명수가 이 사안에 어떤 의견이었는지 내가 모를 수가 없지 않나? ‘판사가 재판에 집중해야 한다. 판사는 재판기관이다’ 이런 얘기 정말 많이 했다. 재판에 집중한다는 게 뭔가? 행정에 손 떼는 거다. 대법원장이 생각이 달라졌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 위헌 의견은 이탄희가 공황 증상을 고백하고 쉬던 중에 나왔다. 마음의 회복에 “엄청나게 방해가 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왜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대법원장이 되기 전의 판사 김명수는, 젊은 판사들과 함께 사법농단에 분노하고 싸웠던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 후배들의 신망은 두터웠고, 사법개혁 의지는 단호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건 이탄희 본인을 공격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대법원장이 배신했다고 하면, 사법농단 파동 때 앞장섰던 개혁 성향 판사 당신들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뜻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자리가 사람을 바꿨다는 뜻인가? 4시간 인터뷰를 통틀어 가장 긴 침묵 끝에, 이탄희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을 잘못 본 것도, 자리가 사람을 바꾼 것도 아니다. 내 표현으로 말하면, 본인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갔다. 주눅이 들었다. 대법원장이라는 자리에 주눅이 들었고, 자기를 에워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고위직들에게 주눅이 들었고. 내가 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갔다’고 하냐면, 자기 주변을 그런 사람들로 배치한 건 대법원장 본인이거든.”
판사 김명수는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되고 “31년간 재판만 해온 사람의 수준을 보여드리겠다”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당시에 이 말은, 판사 본연의 업인 재판은 뒷전이고 법원행정처에서 기획이니 인사니 하면서 법원을 망친 ‘엘리트들’에 대한 통쾌한 일격이었다. 요즘 이탄희는 이 말의 의미를 좀 다르게 생각한다. “판사인 거지, 그냥 판사. 의견이 충돌하면 양쪽 의견을 듣고 중재하고 조율을 하는 민사재판장. 모범생 콤플렉스라고 생각해. 양쪽에서 다 좋은 얘기 듣고 싶고, 민사재판 하듯이 양쪽 얘기 다 듣고 합리적인 조정안 내는 방식으로 행정을 하려 드니까 그렇게 된 거다. 그래서 이건 무능이 아니다. 굴복이지.”
요즘 검찰의 집단행동 보며 떠올리는 것
‘판사 김명수’가 굴복한 대상은 결국 ‘법원 가족주의’였다고 이탄희는 생각한다. 국회에 들어와서 보니, 법원과 검찰은 조직문화도 기능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놀랍도록 꼭 닮은 대목이 있었다. 가족주의다. “신성가족이라고 하잖나. 신성과 가족이 합쳐진 말. 신성은 판사와 검사가 신성하다는 것. 재판과 수사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걸 하는 사람이 신성하다는 치명적인 오독. 가족이라는 건, 판검사들이 모범생으로 살아와서 다른 사회적 경험이 없으니, 사적 자아와 공적 자아 사이에 경계가 없다. 이분들은 직업이 곧 나야. 외부에서 무언가 공격이 들어오면, 법원과 검찰을 ‘지킨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게 되어 있다. 왜? 가족이니까. 그것도 신성한 가족. 이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본능과 감정의 영역이다.” 이탄희는 요즘 검찰의 집단행동을 보면서 사법농단 시절 법원행정처를 자주 떠올린다. 돌이켜보면 양승태 대법원 시절 사법농단의 주역들도 공고한 가족주의자였다.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을 정점으로 하는 법원행정처 멤버들은 ‘법원 가족을 지키는 일을 한다’라는 기묘한 자부심을 공유했다. 국회나 청와대 같은 ‘신성하지 않지만 권력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신성한 법원 가족을 보호하면서 예산과 입법을 따내는 궂은일을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공감대도 있었다. 법원행정처를 싫어하면서도, 이들이 궂은일을 한 덕에 법원이 유지된다고 인정하는 판사가 꽤 흔했다(〈시사IN〉 제638호 ‘재판을 베팅한 내부자들’ 기사 참조). “법원을 위한다”라는 가족주의는 사법농단을 배양한 가장 바탕의 토양이었다. 이탄희가 “법원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해라”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말을 들었을 때 떨칠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던 이유는, 닮지 말아야 할 것이 닮아 있어서였다. 대법원을 적으로 돌려서 좋을 국회의원은 없다. 이탄희처럼 법원 출신이라면 더 그렇다. 대법원장을 정면으로 ‘배신’이라 규정하는 정치인은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그는 한 단어를 툭 던졌다. “생존자. 얼마 전에 이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생존자라는 생각. 한국에서 내부고발을 한 사람 중에 내가 가장 온전한 형태로 생존해 있구나. 그렇다면 생존자로서 할 일이 있겠구나, 그런 생각.” 수많은 사건을 겪은 마음의 상처가 문신처럼 남았다. 대학부터 법원까지 20년 지기가 “법원행정처에 대한 이탄희의 주장은 거짓말이다”라는 취지로 진술한 기록을 눈앞에서 본 악몽 같은 경험도 했다. 그래도 그는, 한국의 내부고발자 중에 매우 드물게도, 살아남았다. 이건 촛불의 힘이라고 느낀다. “2017년에 첫 사표 내고 우리 집에 모인 판사가 5~6명쯤이다. ‘이제 어쩌냐’고 여섯 명이 얘기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한 달 후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원래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할 대법원장을 다음 대통령이 임명하고…. 정말 촛불의 막차에 올라탔다. 나는 그래서 생존자가 됐다. 시민들에게 빚을 졌다. 갚아나가야지.” 그는 지금 생존자의 윤리를 말하고 있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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