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망받는 유망주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 'WBC 국제심판' 김찬수 위원[조영섭의 스포츠산책]

이상훈 2020. 12. 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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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사업에 성공한 복서들의 일대기
지금은 사업가가 된 한국 복싱계의 유망주 복서 김찬수, 임동수, 배형환 등의 링 아래 이야기
장성호와 타이틀전을 펼치는 도전자 김찬수(우측)

[윈터뉴스 조영섭의 스포츠산책] 이틀 전 송파경찰서 강력계 팀장으로 근무하는 김장성 형사가 같은 동료 심판인 김찬수 위원과 함께 망중한(忙中閑)속에서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해 오찬을 함께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이들은 2012년 12월 1일부터 10일까지 멕시코 휴양도시 칸쿤에서 개최된 WBC 50주년 총회에 나란히 한국을 대표해 참석한 WBC 국제심판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일산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1991년 킹스 컵(태국) 국제대회 금메달 리스트 이자 WBO 국제심판과 KPBF 심판을 겸직한 웰터급 국가대표 출신 '상남자' 권만득(동국대)과 사업가 임동수(동아체)가 합류했다. KBF 심판 김장성은 리더의 표본(標本)을 보여주는 모범심판으로, 맏형답게 후배 심판들을 잘 아우르는 복싱인이다.

프로복싱 국제 심판 김찬수, 권만득, 김장성 위원(좌측부터)

필자는 회식자리에서 말은 적게 하고 계산을 가장 먼저 하는 평소 올곧은 인품을 지닌 심판 김장성을 통해 수년 전 첫인상에서 마피아 단 행동대장 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성수동의 밤안개'로 불리는 김찬수와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윽고 문성길 챔프 와 함께 그가 운영하는 성수동 업소에 여러 차례 왕림하면서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고 교류하게 되었다.

셔틀콕 황제 박주봉, 국방부장관 김관진,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마라톤 금메달 김양곤이 태어난 전북 임실 출신의 1965년 4월 3일생 김찬수는 79년부터 김현명 관장이 운영하는 복싱 체육관에서 강원산, 황현재, 박정오 등과 함께 복싱을 수학한다. 김현명 관장은 "찬수가 사우스포이면서도 묵직한 주먹과 근성으로 45kg인 코크급 부터 시작해 밴텀과 페더를 거쳐 웰터급까지 정상급 아마 복서로 활약한 배짱 좋은 슬러거(slugger)였다"라고 회고한다. 

김찬수는 한영중학 시절 에서 밴텀과 페더에서 전국을 석권하며 1982년 박찬희(동아대)를 비롯해 장흥민, 장한곤, 김종원(이하 한국체대) 양설석(경희대) 등을 배출한 복싱 명문 한영고에 입학해 지도교사 양행석의 지휘아래 여러 차례 전국대회에 입상했다.

통산 32전 25승(16KO승) 7패를 기록하며 유장현 (동국대) 오경묵, 원점도(이하 홍익대) 이방헌 등과 전국무대를 아우르며 제2의 한영 고 전성기를 창출한 주역이었다. 특히 안영수 (서울체고)와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비록 패했지만 일진일퇴의 인상적인 접전을 벌여 당시 동국대 동아대 한국체대에서 스카웃 의사를 표명할 정도로 발군(拔群)의 기량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대학진학을 접고 1985년 프로로 전향한다. 그가 속한 일화 프로모션은 동양챔피언인 김복렬과 나경민을 비롯해 황우, 송기회 등 중견복서들이 포진된 신생 프로모션이었다. 특히 영화배우 최민수도 이 체육관에서 수련해 복싱을 익힌 정상급 복서였는데, 89년 우연히 촬영장에서 그의 복싱 스킬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큰 키에서 내뻗는 좌우 훅과 어퍼컷의 각도가 날카롭고 예리해 배우로 전향하지 않았다면 복서로서도 대성할 능력과 재능을 지닌 배우였다. 한편 178cm로 훤칠한 키에 묵직한 파워로 85년 10월 프로로 전향해 2연속 KO승을 따낸 김찬수는 86년 MBC 신인왕 미들급 결승에서 김광수에 판정패 연속 KO승에 제동이 걸린다. 이후 3연승(2KO승)을 기록한후 87년 3월8일 미들급 국가대표 출신의 현재 목포여상 체육교사로 재직 중인 장성호 (88체)와 국내 웰터급 타이틀전을 펼쳤지만 한차례 녹다운이 치명타가 되어 판정으로 고배를 마신다.

김찬수 심판. 문성길 챔프. 김장성 심판(좌측부터)

문성길, 권현규, 이현주, 전칠성과 함께 80년대 초중반 목포대학 전성기 때 독수리 5형제로 활약한 한국 웰터급 챔피언 장성호는 84-85년 대통령배와 전국체전에서 각각 2연패를 달성한 베테랑 국가대표 출신이다. 84년 LA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신준섭(원광대)에게 패한 후 절치부심한 그는 그해 4월 제10회 킹스컵 국제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그해 8월 제34회 대학선수권 우승 85년 서울 월드컵 선발전 우승을 차지하며 민병용 (경남대), 황인도(원광대), 김종훈(동아대), 홍기호(서원대), 김의진 (군산대), 등 국가대표와  7차례 맞대결 5승2패를 기록한 화려한 이력을 겸비한 복서였다.

한편, 전열을 추스린 김찬수는 87년 6월27일 박재용과 웰터급 라이벌전을 펼친다. 61년 충남 청양출신의 강포 프로모션 소속의 박재용은 81년 3월 서울 신인과 4월 전국신인왕전 웰터급에서 차례로 우승을 차지한 후 81년 5월 프로로 전향해 12승(10KO승)4패를 기록한 중견복서였다. 인상적인 장면은 일본으로 향한 4차례의 원정에서 4차례 전부 모두 KO퍼레이드를 펼치며 제2의 황충재 로 주목을 받았다. 4연속 KO승은 전무후무한 초유의 기록으로, 특히 87년 5월 17전 15승(13 KO승) 1무 1패를 기록한 기쿠자키 에이지를 2회에 전광석화처럼 카운터를 명중시켜 2회 KO시키는 장면은 압권 이었다.

이런 전력을 보유한 박재용과 맞선 김찬수는 초반부터 타격전 을 전개하며 2회 2분 6초만에 거함 박재용을 침몰 시키며 황충재, 황준석, 이승순, 정영길을 연결하는 웰터급 황금라인 한축을 담당할 유망주로 부각된다. 이때 88프로모션 심영자 회장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며 영입의사를 보였지만 결렬된 그해 12월 20일, 그는 86년 제16회 MBC 신인왕전 라이트 웰터급 우승자이자 6승 2무1패 (2KO승)을 기록한 태양체육관 박상주와 국내 웰터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분투했지만 석연찮은 판정으로 2:1로 패배해 검은 별을 달자 10전 7승(6KO승) 3패의 전적을 끝으로 복싱을 접는다.

복싱인으로 사업에 성공한 김찬수 KBF 심판위원

여기서부터 김찬수의 화려한 인생 2회전 화려한 원맨쇼가 파노라마처럼 화려하게 펼쳐진다. 산을 움직이는 자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부터 시작하듯이 김성준 챔프가 운영하는 용산의 한 오락실에서 성실하게 잡일을 하며 기회를 모색하던 그는 곧 독립해 주점을 차렸다. 사업이 확장되자 특유의 사업적인 감각으로 서울 도처에 영업점을 확대, 창출되는 이윤을 부동산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재산을 불려나갔다. 30년이 훌쩍 지난 그는 현재 강남의 아파트를 7채 정도 살 수 있는 자산가(資産家)로 성장했다.

지금도 성수동에 3개의 사업체 대표로 17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일선에서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는 수년전 구의원 선거에 민주당으로 출마했던 복싱인이기도 하다. 성공이란 못을 박으려면 끈질김이란 망치가 필요하듯이 김찬수는 절박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계획한 프로젝트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 나갔다. 그의 이런 신념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동행한 동아체육관의 임동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사업가로 입지를 구축한 그는 과거 페더급 한국1위, 동양3위에 랭크된 파이터였다.

85년 5월 프로에 전향해 8전 째인 86년 6월 14일 동양 페더급 챔피언에 등극한 박찬목(현대체)에 판정승을 거둔후 13전째인 87년 5월 17일 동양 jr 페더급 챔피언이자 WBA 밴텀급 챔피언 무구루마 다쿠야를 한차례 꺾은 베테랑 최연갑(88체육관)에 한차례 녹다운을 시키며 무승부를 기록했다. 또한 88년 2월 27일 13전때는 과감하게 일본으로 원정을 떠나, 당대 최고의 복서 산다 야히라와 치른 경기에서 치열한 난타전 끝에 10회 판정승을 거둔 임동수는 89년 역시 만 24살에 복싱을 접고 건설업에서 입지를 견고히 구축했다.

사업가로 성공한 김찬수와 동아체육관 임동수(오른쪽)

뱀띠 듀오인 임동수와 김찬수는 2003년 7월 펼쳐진 이호필과 박종팔의 격투기 대결 때 김찬수는 이효필의 세컨드로 임동수는 박종팔 세컨드로 참여 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서로 고성을 지르며 경기를 진두지휘한 참관인으로써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만남이었다. 김찬수는 이효필과 박종팔 대결 후에 이효필의 세컨을 담당했다는 이유로 경기후 에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렸다고 털어 놓았다. 휴대폰은 물론 자택에도 불이 날 정도로 항의전화가 빗발치듯 몰려와 진통을 겪었던 그때 그날을 그는 웃으며 회고했다.

이하 설명은 각설하고, 복싱인중에 은퇴 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해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한 분은 다 아시시피 전 WBA jr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다. 복서 출신인 염동균의 회고에 의하면 천 억원대는 훌쩍 넘는 자산가로 입지를 구축했지만, 안타깝게도 환갑도 넘기지 못하시고 불귀지객(不歸之客)이 되었다. 김기수의 뒤를 이어서 사업가로 성공한 복서가 원예업계의 대부 배형환(경흥체)이다.

그는 54년 경북 김천 태생으로 72년 1월 프로에 전향하여 3년 7개월 동안 황복수에게 6연패를 당하는등 1승 10패 2무를 기록한 평범한 복서였지만, 은퇴후 채소와 야채를 상징하는 원예농업과 꽃과 풀을 상징하는 화훼 농업을 시작해 밑바닥부터 연구하고 개척하면서 40년이 훌쩍 지난 오늘에서는 농림부 장관상을 받는 등 원예와 화훼 농업에서 손꼽히는 대부로 천문학적인 부(富)를 창출한 인물이다.

그 뒤를 이어 한국 웰터급 1위 김찬수와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오영호, 남산공전 출신의 신두홍과 한국체대를 졸업한 유승기등이 자수성가한 복서 출신으로 입지를 구축한 복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화랑 프로모션 장병호 회장은 자수성가한 복싱인이 아니기에 명단에서 제외한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세월 속에서 강철 같은 의지와 신념으로 자갈밭 같은 자신의 인생을 옥토밭 으로 일군 심판 김찬수의 삶을 반추해보면 문득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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