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가난 [편집실에서]

2020. 12. 16.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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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저의 작은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에 실린 한 가난한 시인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이지요. 저자는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회상”이 있다며 이 부부의 실화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기댈 데가 있다는데 진짜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가 맞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난이 고통스럽고 서러운 것은 사람의 존엄성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배를 곯는다’라는 표현을 썼겠습니까. 불가피한 궁핍은 때로 죽음으로까지 사람을 몰고 갑니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는 “빈곤은 폭력 중에서 가장 고약한 폭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언제든 벗어날 수 있는’ 배고픔과는 차원이 다른 얘깁니다. 같이 밥을 굶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먹을 게 없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을 단식이나 절식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이혜훈 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호 주간경향과 한 인터뷰가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15년째 무주택자로 살다 보니 집주인 전화를 받은 날은 밥도 잘 안 넘어가더라”는 말이 문제가 됐습니다. 이 전 의원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26억원짜리 아파트에 전세로 삽니다. 배우자 명의로 상가 3채도 있습니다. 예금까지 포함해 61억원의 재산이 있다고 지난 8월 재산신고를 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서울 시내 어디에서든 집을 살 수 있습니다.

앞서 “저는 임차인입니다”라는 ‘레전드’ 연설을 한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도 원래는 2주택자였습니다. 연설 직전 세종시의 집을 팔았고, 서울 성북동 집은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7억원 전세에 삽니다. 논란이 되자 자신의 SNS에는 ‘저는 임대인이자 임차인입니다’로 연설문을 슬그머니 바꿨습니다.

이분들뿐 아닙니다. 50~60억원짜리 주택을 가진 다주택자, 수십조의 재산을 가진 대기업 총수, 수억원의 주식을 가진 큰손들도 종부세, 상속세, 양도세 때문에 못 살겠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내는 세금은 복지 재원입니다. 이 정도면 ‘가난놀이’가 아니라 ‘가난을 훔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박완서가 1975년에 쓴 소설 ‘도둑맞은 가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있는 사람들은 가난을 탐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부나 명예를 더 늘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박완서 선생은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깜깜한 절망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전세살이 설움, 배고픈 설움을 겪고 있는 진짜 서민의 심정이 딱 이럴 듯합니다.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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