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정에 폭발한 국민의힘.."누구를 위한 필리버스터냐?"
'주연 빼앗기' 시비에 여야 감정싸움 격화
“180석으로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국민의 대표의 입을 틀어막은 민주주의 질식 사건이다.”
15일 국민의힘 원내대책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주호영 원내대표는 전날 밤 자신의 필리버스터 마지막 발언을 ‘패싱’ 하려 한 더불어민주당의 시도를 격한 어조로 비난했다. 필리버스터 종료 시점(14일 오후 8시50여분께)이 지나서야 연설을 마친 이재정 민주당 의원과, 이를 용인한 민주당 지도부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대체 14일 밤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필리버스터의 주연은 누구인가?
주호영 원내대표는 필리버스터의 취지가 “야당이 발언으로 국민에게 국정을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필리버스터의 ‘주연’은 야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제한 토론) 총 85시간 36분 중 여당이 24시간19분(28.4%)의 토론시간을 잠식하며 제도 도입의 취지를 훼손했다”는 이종배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무제한토론은 쟁점 안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여야의 물리적 충돌과 입법 교착을 막기 위해 여야가 18대 국회 막바지인 2012년 5월2일 국회법 개정안을 합의 처리하면서 재도입됐다. 당시 개정 국회법의 취지가 “쟁점 안건의 심의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고 안건이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심의되며, 소수의견이 개진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자는 것이었던 만큼, 무제한토론 역시 안건 처리에 반대하는 소수당이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반대 의견을 개진해 의사진행을 합법적으로 지연시키는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실제로 지금까지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것은 항상 의석수에서 밀리는 야당이었고, 그 목적 또한 법안 처리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하지만 필리버스터에 반드시 야당 의원만 참여하라는 법은 없다. 국회법 제106조 2항은 무제한토론을 “의원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이 법의 다른 규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토론”으로 정의할 뿐, 토론의 참여 자격을 제한하지 않는다. 야당이 무제한토론을 신청했어도, 여당 의원들도 중간중간 발언대에 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당 의원의 장시간 토론…절차상 문제없다지만
이번 무제한토론에서는 민주당 의원들이 전체 시간의 4분의 1 이상을 썼다. 여당 의원 몇 사람이 토론 초반에만 몇 차례 연단에 오르던 것과는 대조된다. 국민의힘이 “과거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필리버스터를 할 때 192시간을 오롯이 그쪽에 보장했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이유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민주당보다 2.5배 정도 많은 시간을 썼다는 점에서 야당이 충분한 반론 제기의 기회를 누렸다고 볼 여지도 있다.
법적인 문제가 없는데도 국민의힘이 격하게 반발한 데는 민주당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애초 “필리버스터 법안에 대해 충분히 의사표시를 보장해달라는 야당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10일 홍정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며 야당의 무제한토론을 강제 종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틀 만에 입장을 바꿨다. 무제한토론에 나섰던 김병기 민주당 의원이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한 사실, 10∼11일 600명대였던 확진자 수가 12일 900명대로 급격히 늘어난 상황 등을 고려해 부득이하게 무제한토론을 종결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의힘은 초선의원들의 활약으로 무제한토론에 관심이 쏠리자 민주당이 코로나를 빌미로 말을 바꾼 것이라고 반발했다.
갈등은 필리버스터 마지막 날인 14일 급격히 고조됐다. 민주당 토론자로 나선 이재정 의원이 강제종결 예정시각을 넘긴 시점까지 단상에서 토론을 이어가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폭발한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 의원이 무제한토론의 마지막을 다음 주자인 주호영 원내대표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다고 의심했다.
존중·배려 실종된 21대 국회의 단면
여야와 의장실 관계자 말을 종합해보면, 국민의힘은 이날 낮 12시께 무제한토론 참가자 명단에 주호영 원내대표를 올렸고,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이재정 의원실 관계자도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 의원이 토론을 시작하기 전 국민의힘이 주 원내대표를 무제한토론 마지막 주자로 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원내지도부의 별다른 지시가 없어 발언을 이어갔다고 했다. 김태년 원내대표 등의 지시가 있었으면 주 원내대표에게 마지막 발언을 양보할 의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민주당이 ‘상대당 원내대표를 배려해 발언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소수당을 존중하는 배려심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애초 무제한토론을 시작하면서 ‘야당 존중’의 뜻을 밝혔던 민주당인 만큼, 중간에 그 입장을 번복했다면 강제종결 과정에서는 마지막 주자를 야당에 양보하는 게 ‘승자의 관용’이란 기준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토론 종결 여부를 표결에 부치기 직전인 14일 오후 8시50분께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를 설득해 주호영 원내대표에 30분의 발언 기회를 준 데에도 같은 인식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지원 김미나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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