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단독]2~3점 뿐이라던 안평대군 진적, 알고 보니 오구라 유물에도..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2020. 12. 1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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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제강점기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반출해간 ‘오구라 유물’에 속한 안평대군 이용의 ‘행서칠언율시축’. 이 작품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오구라 유물을 조사한 뒤 펴낸 도록에 실려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도록에서


‘어, 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네. 진적이 거의 없다고 하더니만….’ 얼마 전 필자가 이른바 ‘일제강점기 오구라(小倉)와 오쿠라(大倉)의 한국 문화재 반출’ 기사를 준비하면서 이른바 ‘오구라 유물’의 도록을 훑어보았다. 도록은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국외소재 문화재 조사사업의 하나로 일본 도쿄(東京) 국립박물관을 찾아가 4차례에 걸쳐 조사했던 1100여 점의 사진과 함께 유물 설명을 곁들였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 제12책’, 2005).

필자는 주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 및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된 39건을 위주로 기삿거리를 찾았다. 그러다가 회화·전적·서예 부문까지 훑어보던 필자의 시선이 머문 곳이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유물 도록에 안평대군의 작품과 함께 유물 설명을 붙였다. 안평대군 행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목록에 포함된 안평대군 글씨

바로 ‘오구라 유물 목록’ 863번째에 나와있는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글씨였다. ‘행서칠언율시축’, 즉 행서(획을 악간 흘려쓰는 서체)로 된 두루마리 칠언율시(34.1×56.5㎝)였다. 도록의 뒤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된 작품설명이 붙어있었다.

“행서의 명가(名家)로 필속(筆速)의 완급, 필획의 강약, 허획과 실획의 운용 등의 특징에서 안평대군 행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안평대군의 글씨라면 대부분 <해동명적>(신라말~조선초 명필의 글씨를 모아 목판 및 석판으로 새긴 서첩)의 석판 혹은 목판으로 찍은 서첩 등으로 전해졌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 두전>의 전서와, <심온묘표>의 예서도 안평대군의 글씨는 맞다. 하지만 비석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받아 각수가 새긴 것이다.

안평대군의 글씨임을 확산하게 하는 독특한 서법. 조맹부의 서법을 따랐지만 자유분방한 자신만의 필법을 구사했다.


따라서 본인이 먹을 묻혀 종이에 직접 쓴 글씨를 뜻하는 진적(眞蹟)과는 거리가 있다.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안평대군의 진적이라면 일본 뎬리대(天理大)가 소장한 ‘몽유도원도’ 발문과, 2001년 도난당해 지금은 볼 수 없는 ‘소원화개첩’(국보 238호) 정도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최근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27.9×14.3cm)가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33살이던 안평대군이 엄상좌라는 노 대선사를 떠나보내며 쓴 글씨첩이다.

오래도록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 등 딱 두 점으로 알려져 있던 안평대군의 진적이 이제야 3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오구라 유물 중에도 제4의 안평대군의 진적이 있다는 것인가.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꼽힌 ‘재송엄상좌귀남서’. 송설체의 아리따운 교태를 넘어 단아한 기품을 바탕으로 한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안평대군의 글씨가 틀림없다

하여 도록에 실린 글씨 사진을 몇몇 서예 전문가에 보여줬더니 돌아온 대답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면 안평대군의 글씨가 맞냐고 물었더니 “작품을 친견하지 않았으니 단언할 수는 없다”고 전제했지만 “사진상 보면 안평대군의 글씨가 틀림없는 것 같다”는 답이 나왔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송설체(원나라 조맹부의 서체·조맹부의 서재 이름이 송설재였다 해서 붙인 이름)를 조선화시킨 주인공으로 풍류왕자 안평대군의 유려하고도 격조 높은 안평대군 글씨가 잘 드러나있다”고 평가했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은 “작품 말미에 흘려쓴 ‘청지(淸之·안평대군의 자)’는 안평대군 서체의 전형적인 형태”라면서 이 작품 속에서 보이는 안평대군의 몇가지 특징을 설명한다. 즉 ‘도(途)’자의 책받침을 살짝 구불구불하게 흘려 쓴 것은 안평대군 특유의 필법이라는 것이다. 고기가 노니듯 세번 구부린데 해서 유어삼절법(游魚三節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연미(아름답고 수려)하기만 조맹부체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또 ‘나(那)’자의 오른쪽(제방)의 세로 획이 올라간다든지, 윗부분이 멋들어지게 휜 ‘있을 유(有)’ 자 등을 종합할 때 안평대군의 글씨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2006년 일본 뎬리대 소장 ‘몽유도원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그리고 안평대군의 발문과 함께 신숙주, 이개, 김종서, 박팽년 등 당대 대표문인들의 시문과 글씨를 모아놓았다.|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박물관개관100주년기념특별전-여민해락> 도록, 2009년에서(일본 뎬리대 소장)


이 기사의 모두에 인용한 안평대군 글씨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중국 당나라의 선승인 동안상찰(?~961)이 칠언율시 형식으로 노래한 10수의 게송 중 2번째인 ‘조의(祖意)’”라고 했다.

“조사의 뜻은 공한 것 같지만 공하지 않으니(祖意如空不是空) 참된 기틀이 어찌 있다 없다는 공과를 따지랴(眞機爭墮有無功)…”.

필자와 같은 장삼이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선문답 같은 것이다. 그저 선종의 일파인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노래한 시라는 것만 알면 된다.

궁금증이 생긴다. 200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오구라 유물’을 조사하고 도록을 펴냈을 때 이 안평대군 글씨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다. 아마도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일본 중요문화재와 미술품 등으로 지정된 39건 위주로 조사했기 때문에 여타의 유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못했을 것 같다는 추정만 할 뿐이다.

당시 현지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미술공예실이 주도했다. 그래서인지 서예·전적(22점)의 조사·연구는 깊이있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오구라 유물’의 안평대군 글씨가 진짜가 맞다면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 그리고 최근 진적으로 평가된다는 ‘재송엄상좌귀남서’ 등에 이어 4번째 진적인 셈이 된다. 물론 작품을 실제로 친견해봐야 최종판단할 수 있다.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 같다.

‘몽유도원도’ 발문 부분. 안견이 그린 그림에 안평대군이 글을 붙였다. 안평대군의 꿈에 도원에서 노닌 광경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에게 그리게 한 뒤 자초지종을 발문에 썼다.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는 안평대군이 썼다

이와 별도로 필자는 최근 그 유명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의 한자를 쓴 주인공이 안평대군임을 논증한 논문을 보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의 ‘<훈민정음 해례본>의 등재본(登梓本) 제작과 서체’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은 오는 26일 발행될 학술지 ‘<문화사학> 54호(한국문화사학회)’에 게재된다.

지금까지 귀가 아프도록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들었던 필자에게 해례본에 쓰인 한자의 작가가 안평대군이라는 이야기는 색다른 것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등재본이 무엇인가. 알다시피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발행된 훈민정음 해설서이다. 목판으로 찍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 230종류 537자와 한자 728종류 4761자로 구성됐다. 그런데 이 책을 목판으로 찍어내기 위해서는 한글과 한자의 필자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우선 종이에 글자 수가 많은 한자를 쓴 뒤, 공란으로 남겨놓은 한글 부분의 경우 한글 목활자로 눌러 채워 넣어 완성했다, 이것이 목판에 새기기 위해 제작한 등재본이다. 이 등재본을 풀에 묻혀 뒤집어서 나무에 조심스럽게 붙여놓고 글자의 획을 따라 각수가 새긴 뒤 완성한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 바로 목판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본으로 찍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한자가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것이 정설이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등재본에 새긴 한글 목활자는 당대의 명필 중 한사람인 강희안(1418~1464)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해례본’ 중 절대 다수의 한자의 필자는 누구인가. ‘해례본’에 등장하는 ‘정인지 후서’의 내용, 즉 ‘신 정인지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절하며 삼가 쓴다(臣 鄭麟趾拜手 稽首謹書)’는 내용 때문에 정인지(1396~1478)의 작품인 것처럼 됐다. 학계 일각에서도 “세종대왕 당시에는 수양대군(세조 1417~1468·재위 1455~1468)이 <동국정운> 등 주요 간행물의 글씨를 전담했다”면서 “그런 가운데 정작 가장 중요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안평대군이 썼을 리 없다”는 견해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와 안평대군 글씨의 목판본 등과 비교하면 너무도 흡사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의 논문에서


그렇지만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는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것이다. ‘정인지 후서’ 또한 문장은 정인지가 짓고 글씨는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보는게 합리적이란다. 손환일 소장은 “그러나 지금까지 안평대군 글씨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지적한 연구결과는 볼 수 없다”면서 “이번 논문은 안평대군 글씨의 목판본인 ‘진초천자문’과, ‘엄상좌찬’ 서첩의 글씨와 조목조목 비교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초천자문’은 불세출의 서성(書聖)인 왕희지(307~365)의 7대손 지영 스님이 해서와 초서로 쓴 것을 안평대군이 다시 쓴 작품이고, 엄상좌찬은 안평대군이 엄상좌라는 스님의 불법강연을 들은 뒤 이별을 아쉬워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그런데 ‘해례본’과 ‘진초천자문’의 글자 중 오른쪽에 점을 찍는 습관은 안평대군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또 ‘쇠 금(金)’에서도 오른쪽 새로획이 올라간 것도 마찬가지다. 굳이 구체적으로 비교할 필요도 없겠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훈민정음 해례본>과 ‘진초천자문’과 ‘엄상좌찬’의 글씨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러한 비교연구가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비전문가가 봐도 안평대군의 글씨와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글씨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손환일 소장의 논문에서


■중국 황제도 감탄한 서예가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안평대군의 작품 하면 ‘몽유도원도’ 발문과 2001년 도난 당한 ‘소원화개첩’ 정도만 떠올린 것 같다. 물론 실물을 쉽게 볼 수 없고(‘몽유도원도’ 발문), 또한 소재 불명인 채(‘소원화개첩’)인 두 진적의 케이스는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던 차에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재송엄상좌귀남서’가 진작으로 꼽히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할까.

돌이켜 보면 안평대군의 작품은 당대 중국 황제(명 경제·재위 1450~1457)로부터 “매우 좋다. 꼭 이것이 조맹부(1254~1322)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원나라 서예가인 조맹부는 왕희지 글씨의 정통적인 서법과 고법을 바탕으로 필법이 굳세고 아름다웠다는 평을 듣는 명필이다. 그런데 명 경제가 ‘안평대군=조맹부’라 했지만 실은 안평대군이 한 수 위였다. 안평대군은 이 조맹부의 필법에다 ‘호매한 필력과 늠름한 기운을 담아 날아 움직일 듯한 서법을 더 얹었다’는 극찬을 받았다(<용재총화>).

이후 조선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면 중국 사람들은 “당신네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또 어찌어찌해서 중국의 유명한 글씨를 구입한 조선인들이 귀국해서 작품을 감식해보면 그중 절대 다수가 안평대군의 글씨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사온 글씨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고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며 기뻐했다.(<연려실기술> ‘전고·필적’)

국보 238호 ‘소원화개첩’. 안평대군의 진적인데, 2001년 도난당해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개인소장


■뿔뿔이 흩어진 작품들

그렇게 잘나가던 안평대군이 어느 순간 신숙주(1417~1475)에게 자신이 수집한 작품들을 보여주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아! 물(物)이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다 때가 있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운수가 있다.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어찌 알겠는가”(<동문선> ‘신숙주·화기’)

안평대군 자신과 안평대군이 평생 쓰고 모아둔 작품의 운명을 소름끼치도록 예감한 것이 아닌가.

말이 씨가 되었다. 안평대군이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으로 36살의 젊은 나이로 사사된 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자신의 작품과 소장품들이 모두 몰수됐다. 그 와중에서 일부가 시중에 흘러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작품은 지금으로 치면 국보급 문화재의 대접을 받았다. ‘안평대군의 작품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사대부의 자랑이자 로망이었다. 예컨대 조선 중후기의 문인 송준길(1606~1672)은 이후원(1598~1660)에게 보내는 편지(1640)에서 “나에게도 안평대군의 친필이 있다”고 자랑했다.(<동춘당집>)

“저에게도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의 친필이 있습니다. 형(이후원)께서 보신다면 형의 기호품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것을 단연 으뜸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안평대군의 ‘집고첩발(集古帖跋)’. 1443년(세종 25) 안평대군이 역대 명필의 서첩을 모은 책(<집고첩>)에 쓴 발문이다. 석각 첩장이다.|개인 소장


■안평대군 작품 소장은 가문의 보배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아예 안평대군이 쓴 책의 인쇄본 2~3책을 베껴서 활자로 만든 뒤 다시 인쇄본을 여러 책 찍어냈다. 그러자 “인쇄본을 구하려는 사대부들이 앞다퉈 달려왔다”(<백사집>)고 한다. 지금 같으면 불법 복제물, 즉 해적판을 마구 찍어낸 셈이니 저작권법으로 처벌을 받아야 했을 판이다. 그러나 백사는 안평대군의 해적판을 찍어 자신이 관할하는 훈련도감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다소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나 할까.

조선 중기의 문인 윤근수(1537~1616)는 “필획이 정밀하고 광채가 나서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는 안평대군의 작품들은 모두 희귀한 보물”(<월정집>)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는 작은 종이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커다란 옥 같은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

그러면서 윤근수는 “친구가 선물로 준 안평대군의 책과 족자를 모두 잃어버려 가슴이 아팠다”면서 “겨우 비해당첩(안평대군의 글씨책)을 얻었는데 아직 장황(표지장식)을 하지 못했으니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안평대군이 쓰던 물건 역시 가보가 됐다. 예컨대 안평대군의 별장터였던 곳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벼루를 수습한 적이 있었다. 이 밭은 당시 승지 박동열(1564~1622)의 소유였기 때문에 벼루 역시 박동열의 것이 됐다. 윤근수는 이 대목에서 “안평대군이 죽은지 100년이 지났고 그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면서 “벼루가 한창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며 날마다 글씨를 쓰고 있는 박군(동열)에게 갔으니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부러워했다. 윤근수는 그러면서 “벼루가 박군에게 간 것도 운명이이니 보물로 간직하여 영원히 반남 박씨 집안에서 대대로 지키는 가보로 삼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전했다.

“중국 조정 선비들이 자연미 넘치는 불세출의 안평대군 작품을 한장씩 얻어도 가보로 삼았다”(<태허정집>)는 최항(1409~1474)과, “인간의 신묘한 솜씨 오래 흠모했는데 과연 높은 이름 나타나 천하가 다 알게 되었다”(<박선생유고>)고 읊은 박팽년(1417~1456) 등 동시대인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1595~1682)은 “안평대군의 글씨는 그 변화무쌍함이 신의 경지”(<기언> ‘별집·발’)라 했고,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안빠(안평대군 빠)’임을 자처했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으뜸이다…강건하면서도 원활하고 우아하면서도 아름답다. 안평대군은 족제비털로 백추지(다듬이로 부드럽게 편 흰종이)에 글씨를 썼는데…”(<홍재전서> ‘일득록·문학’)

서울 종로구 부암동 안평대군의 별장터인 무계정사터.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 수많은 문인 선비들이 드나들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진적은 국내에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 안평대군의 또다른 진적으로 추정되는 ‘오구라 유물’과, 그동안 대중적으로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 필자가 안평대군이라는 사실 등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 안평대군의 흔적이 실제로는 여기저기 남아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서예 전문가들은 안평대군의 진적이 분명 국내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재송엄상좌귀남서’가 대표적이다.

손환일 소장과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개인 소장가들은 진작이 분명한 안평대군의 글씨를 좀처럼 공개하지 않고 있다”면서 “섣불리 공개했다가 누군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서화는 사찰을 지키는 금강역사와 같은 눈(금강안·金剛眼)과 혹독한 세리와 같은 손(혹리수·酷吏手)으로 봐야한다”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언급처럼 철저하게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추사와 같은 안목을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 작품이 안평대군의 것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국내에는 장담하건대 안평대군의 진적은 없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군가 혹시 안평대군의 진적을 소장하고 있다면 이런 판국에 굳이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요즘처럼 누구라도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 의견을 낼 수 있는 시대라면 그 누구라도 ‘그 작품은 가짜’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은 진위와 상관없이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만다”고 말했다.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일본 뎬리대 소장 ‘몽유도원도’가 출품되어 수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뎬리대에서는 그때 “이번이 마지막 대여”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선무당이 안평대군을 죽이는가

그런 의미에서 1450년(세종 32년)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 예겸(1415~1479)의 안목이었다면 쉽게 안평대군의 진작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예겸 등은 안평대군이 쓴 현판의 두 글자를 보고 “이 글씨는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예겸은 범옹 신숙주(1417~1475)가 들고 있던 책표지에 ‘泛翁(범옹:신숙주의 자)’이라고 쓴 안평대군의 정자 글씨를 보고 “필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이냐. 글씨 좀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신숙주는 이때 “강희안이 쓴 것”이라고 둘러댄 뒤 강희안의 글씨를 받아 주었다. 그러자 예겸은 대번에 “이것은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니다”라고 딱 잘랐다.(김안로의 <용천담적기>) 하기야 이 시대엔 예겸같은 감식가가 나타나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지는 의문이다. 예겸이 재림해서 ‘안평대군 진작이 맞다’해도 온라인 공간에서 ‘무슨 소리냐’고 지적하는 순간 수많은 찬반댓글이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선무당들이 안평대군의 진적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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