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정유업계가 존폐 기로에 섰다. 단순 일회성 위기가 아니다. 정유 수요가 줄고 국제유가마저 급락하면서 대규모 손실이 쌓이고 있다. 변동성이 큰 수익 구조는 오히려 사정이 나은 편이다. 수입한 원유를 정제해서 수출하는 정유 산업 구조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 수출 판로도 점점 좁아진다. 버티기에 돌입한 정유사가 손실을 언제까지 감당할지 알 수 없다. 전세계적으로 부는 탈석유화 바람은 정유사의 위기를 더 가속시키고 있다. 누가 먼저 죽을지 지켜보는 ‘데스게임.’ 팽배해진 정유업 비관론 속 남아있는 생존카드는 뭘까. 반전을 이룰 수 있을까.
서울 강동구 상일동 GS 칼텍스 ‘융복합 에너지 스테이션’. /사진=뉴스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최악의 침체기를 보내고 있는 정유업계가 신사업 발굴에 매진하고 있다. 화학과 수소 등 유관 사업은 물론이고 유통업체와 손잡고 물류 배송을 맡거나 공유 주차 사업에까지 발을 들이는 등 각종 자구책을 쥐어 짜내고 있다.
‘정제 마진’(최종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수송·운영비 등을 뺀 것) 적자가 이어지고 글로벌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체질 개선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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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보다 ‘석유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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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업계는 기존 정유 사업 중심 구조에서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해 석유·화학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GS칼텍스는 올레핀 생산 시설(MFC)에 2조7000억원 투자를 결정했다. 올레핀은 플라스틱·합성고무·합성섬유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기초 원료 물질이다. 연간 에틸렌 70만톤과 폴리에틸렌 50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로 내년 상업 가동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다. GS칼텍스는 MFC를 통해 연간 4000억원 이상의 추가 영업이익을 기대하고 있다.
원유 정제 사업이 주력인 현대오일뱅크도 내년부터 올레핀 공장 가동을 시작한다. 회사는 올레핀 석유화학 공장인 HPC(Heavy feed Petrochemical Complex)에 2조7000억원을 투자해 내년 완공한다. 현대오일뱅크가 공장에 거는 기대는 상당하다. HPC 공장이 가동되면 매년 폴리에틸렌 75만톤과 폴리프로필렌 40만톤을 생산할 수 있다. 이 경우 전체 영업이익에서 석유화학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25%에서 50%로 늘어난다. HPC는 원유 찌꺼기인 중질유분을 주원료로 사용해 원가 절감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에쓰오일도 ‘Oil to Chemical’(석유에서 화학으로) 전환에 나서며 석유화학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석유화학 프로젝트는 석유화학제품을 고도화하기 위해 7조원 규모의 복합 석유화학 시설을 건설하는 대규모 사업으로 에쓰오일의 모회사 ‘사우디아람코’가 개발한 기술을 적용한다. 저부가가치의 잔사유를 휘발유와 프로필렌으로 전환하고 이를 다시 고부가가치 석유화학 제품으로 변환하는 첨단 기술이다.
현재 프로젝트는 타당성 검토 단계며 아람코로부터 내년 하반기 또는 2022년 초에 최종 투자의사 결정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공사가 완료되면 회사는 연간 폴리프로필렌 40만5000톤과 산화프로필렌 30만톤을 생산할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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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빌리티·라이프 서비스 주유소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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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업 모델 찾는 정유업계. /그래픽=김영찬 기자
SK이노베이션은 2010년부터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강화하면서 정제 마진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SNE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배터리 시장은 ▲LG화학(1∼9월 누적 기준 점유율 24.6%) ▲중국 CATL(23.7%) ▲일본 파나소닉(19.5%) 등 3강 체제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5년 후 세계 3위에 진입하겠다는 청사진을 세웠다.
이를 위해 회사는 기존 설비에 더해 내년 1분기부터 중국 옌청 배터리 2공장을 가동하고 2022년 1분기부터 헝가리 제2공장과 미국 1공장을, 2023년 1분기부터 미국 제2공장을 순차적으로 확대 가동할 예정이다.
정유사는 일제히 수소 충전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주유소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 수소차 사업 확장에 빠른 대응이 가능하다. SK에너지는 평택에 수소 충전소 1개소를 구축하고 있으며 에쓰오일 역시 마곡연구소 부지에 수소 충전소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기존 주유소에 전기차 충전시설을 추가 설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정유사들은 주유소 내 유휴부지를 활용한 수익 창출에도 집중하고 있다. 물류 플랫폼으로 주유소 부지를 제공하거나 주차난이 심각한 지역에 위치한 주유소에서 공유 주차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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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ICT 접목 새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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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오일뱅크는 온라인 쇼핑몰 쿠팡과 손잡고 주유소 22곳을 ‘로켓 배송’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유소 부지를 제공한 대가로 임대 수익을 얻는 방식이며 내년 상반기 로켓 배송 거점 주유소를 50곳 이상 늘린다. 또 회사는 주유소에 사물인터넷(IoT) 기반 공유 주차 서비스를 설치해 수익을 내고 있다. 고객이 모바일 앱을 통해 빈 곳을 실시간 확인한 뒤 주차를 할 수 있게끔 했다.
GS칼텍스는 서울역 인근 역전 주유소를 13층 규모의 전기·수소차 충전소와 식당가·편의시설·드론 배송 등이 어우러진 상업용 복합시설로 개발하기 위해 첫 삽을 뜨기도 했다. 에쓰오일은 주유소에서 공유 전기자전거 대여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업 구조를 친환경·플랫폼 중심으로 전환하는 곳도 있다. SK에너지는 이달 마케팅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플랫폼 회사로 성장을 추진하는 ‘P&M’(플랫폼과 마케팅) 사내 독립기업을 도입했다. 회사는 앞서 정관 개정을 통해 ‘통신판매(중개)·전자상거래 관련 사업’을 회사의 사업목적으로 추가하고 플랫폼 사업에 진출하는 근거를 마련해뒀다.
에쓰오일도 신사업 모색을 목적으로 벤처기업 투자에 나선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스마트 공장 등 당사의 제조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분야나 소재 사업 등 신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는 분야가 투자 대상”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