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원칼럼] 이가난진(以假亂眞)

강호원 2020. 12. 14.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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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비리 은폐' 문을 연 공수처법
국민에 재갈 물린 5·18, 대북전단법
이런 폭주가 "민주주의 새 장"인가
'거짓' 못 가리면 국가위기 닥칠 것

이가난진(以假亂眞). 이위난진(以僞亂眞)도 같은 말이다. 거짓으로 진실(참)을 어지럽힌다는 뜻이다. ‘한서’를 편찬한 반고가 한나라를 들어먹은 왕망을 평한 말이다. 남북조시대 북제의 안지추는 이 말을 ‘안씨가훈’으로 삼았다. 권력을 좇는 부나방이 들끓는 난세, 왕조의 부침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 시기에는 권모술수와 혹세무민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거짓은 난무하고 모두가 옳다고 여기는 상식은 파괴된다.

“이가난진을 경계하라.” 난세의 논리를 꿰뚫어 본 두 학자는 바로 그 말로 후세를 경계했다.
강호원 논설위원
석현. 전한의 환관이다. 간신을 급으로 따진다면 지존급에 속하는 역사적인 간신이다. 이가난진으로 무장했다. 교활한 두뇌, 독한 심보, 기막힌 말솜씨, 마당발…. 그의 이가난진은 어땠을까. 감언으로 황제를 속여 충신을 하나하나 제거한다. 당대의 충신 소망지와 주감도 참소에 죽음을 면치 못했다. 불리하면 충신을 방패막이로 삼고, 또 토사구팽한다. 환관의 권력 농단은 그로부터 시작됐다. 석현이 죽은 뒤 조사했더니 받아먹은 뇌물은 산더미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간신은 석현을 공부했다. 그의 무엇을 배웠을까. 바로 이가난진을 배웠다.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의 평가, “그의 사악한 논설과 궤변은 참으로 구분하기 힘들다.”

지금은 어떨까.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더할지 모르겠다. 거짓은 SNS를 타고 광속으로 번져가는 시대이니. 정치 권력은 폭주한다. 헌법과 법치, 민주주의의 가치를 깃털보다 가볍게 여기면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거대 여당은 이 법률을 단독으로 만들더니 이번에는 처장 후보 선출에 관한 야당 비토권마저 박탈했다. 대통령·여당 입맛에 맞는 수장 임명의 길을 텄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월성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 의혹,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옵티머스·라임펀드 사건의 정·관계 연루 의혹…. 이들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질까. ‘살아 있는 권력’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총장을 공수처 수사대상 1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판에 이들 사건 수사의 운명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초록동색을 앉혀 흔적을 지운 뒤 이런 말을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깨끗하다”고.

관심을 끄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새 장이 열리는 역사적 시간”이라고 했다. “권력기관을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고… 헌법정신에 입각해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야당 비토권마저 없앤 공수처. ‘정치로부터 독립된 권력기관’? 많은 법률가는 “권력 비리를 은폐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고 한다. 어느 모로 보나 그렇다.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사법권의 독립과 정치 중립성이 뿌리째 흔들리는 판이니. 대통령의 말은 거짓(假)일까, 참(眞)일까.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하거나 대북 전단을 날리면 감옥에 보내는 5·18역사왜곡처벌법과 대북전단살포금지법. 국민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헌법으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한번 발휘했다가는 옥고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 오죽하면 “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 몰랐다”(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한탄까지 한다. 지금이 일제강점기인가. 이런 것을 두고 ‘민주주의의 새 장’이라고 하는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참일까.

권력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총장 내쫓기는 절정을 이룬다. 전후좌우 어디를 봐도 정당성과 공정성은 찾기 힘들다. 법무장관의 ‘반(反)법치’ 폭주를 두고 검사들은 일제히 항의하고 나섰다. 이에 대한 여당 원내대표의 말, “어느 행정부 어느 부처 공무원들이 이렇게 집단행동을 겁 없이 감행하느냐”고 했다. 되물어 보자. 어느 정권 어느 정부가 이런 식으로 권력형 비리를 감추고자 했던가. 김영삼·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가족이 감방 신세를 져도 감수했다. 왜? ‘법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 권력 비리를 파헤치는 수사 책임자는 남아나질 못한다. 수호지 흑선풍이 도끼를 휘두르는 것처럼 날린다. 검찰 개혁? 그 구호는 거짓일까 참일까.

이가난진의 망령은 활개친다. 이제 어떤 역사의 장이 열릴까. 민주주의의 새 장? 암흑시대의 장이 어른거린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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