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왜 단병호 앞에서 마음이 복잡했을까

박찬수 2020. 12. 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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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12
2004년 5월31일 청와대 주최로 열린 노사정 토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이수호 위원장 왼쪽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다. 이 무렵이 참여정부와 노동계의 관계가 그래도 가장 좋았던 시절로 꼽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진보정권과 노동계는 철저하게 ‘기브 앤 테이크’로 갔다. 보수정권과는 타협의 여지가 별로 없으니 ‘투쟁과 대결’이 기본 구도다. 진보정권과 노동계는 그래도 서로 주고받을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브 앤 테이크’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걸 손에 쥘 수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주면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으리란 믿음, 10개 중 핵심적인 2개를 합의하지 못해도 나머지 8개를 우선 받아들이려는 생각은 손쉽게 배척됐다.

1999년 3월 민주노총의 정책 담당자 몇 명이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네덜란드 노총(FNV)과 우리나라 노사정위원회 모델인 사회경제이사회(SER)를 돌아보고 온 뒤 집행부에 보고서를 하나 제출했다. 결론에 ‘네덜란드 모델이 노동조합 전략에 주는 시사점’이란 부제가 붙은 보고서엔 이런 내용이 담겼다.

“1970년대 이후 네덜란드 노총은 노조 조직률의 지속적 하락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노동환경 변화로 파트타임 노동자들은 계속 늘어나는데, 노총은 파트타임 노동에 반대하며 이들을 외면했다. 결국 네덜란드 노총은 파트타임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을 풀타임 노동자와 동일하게 보호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화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1970년 40%에서 1985년 21%까지 떨어졌던 노조 조직률은 1998년엔 29%까지 회복됐다. (…) 우리나라도 비정규 노동자가 이미 정규 노동자와 맞먹는 규모로 늘어났지만 이들의 조직화에 가장 핵심적인 걸림돌은 노동조건에서 이들이 정규직에 비해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를 쓴 주진우 민주노총 조사통계부장(현 서울시사회서비스원 대표)은 “그때 네덜란드 상황을 보고 정규직 노조 중심의 우리에게도 곧 닥칠 문제라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 그래서 노동형태 변화에 대응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가 시급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썼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라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 영감을 얻은 건 노조만이 아니다. 정부도 그랬다. 네덜란드는 1982년 임금 동결과 일자리 확대를 맞바꾸는 사회적 대타협인 ‘바세나르 협약’으로 유명했다. 2005년 노동계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노무현 대통령은 ‘선진국의 노사관계 개혁사례를 연구해 보고하라’고 노동비서관실에 지시했다. 그렇게 작성된 게 네덜란드 사례 보고서였다.

청와대와 민주노총 보고서는 강조점이 다르다. 민주노총 보고서가 노조의 조직 확대와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면, 청와대 보고서는 ‘대타협을 가능케 한 정부의 일관된 정책과 주도적 역할’에 주목했다. 눈에 띄는 건 양쪽 모두 ‘타협’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다. 청와대 보고서는 “네덜란드 사회적 대타협 과정에서 ‘타협이 최선’(Something is better than nothing)이라는 공동 인식이 원동력이 됐다”고 썼다. 민주노총 보고서는 “네덜란드 모델은 네덜란드 전통과 관행의 제도적 표현이다. 다만, 위기가 있다면 극복을 위해 협력하는 게 싸우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네덜란드 노사는) 생각한다”고 적었다.

진보정권과 민주노총 모두 ‘네덜란드 모델’에 주목한 지 20년 가까이 흘렀다. 그러나 바뀐 것은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갈등이 심해진 진보정권과 노동계는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도 사회적 대화와 타협에서 한치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왜 진보정권과 노동계는 불화하는 걸까. 보수정권에서 노-정의 격한 충돌은 정책 지향의 근본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다. 그러나 ‘노동과 복지’를 중시한다는 진보정권 아래서도 정부와 노동계는 대화마저 쉽지 않은 갈등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노-정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경제 개혁을 위한 핵심 사안에서 우리 사회의 진전을 가로막는다. ‘노동존중 사회’나 ‘복지국가’라는 목표는 진보정권과 노동계의 협력 없이는 실질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노-정 대화와 협상에 참여한 적 있는 인사들은, 진보정권과 노동계의 서로에 대한 엇갈린 감정이 미묘하지만 중요한 간극을 만든다고 말한다. 노무현·문재인 두 대통령은 노동인권 변호사로서 1980~90년대 민주노총 핵심 인사들을 변호하고 현장에서 함께 투쟁한 사이였다. 2003년 9월30일 노 대통령과 민주노총 지도부 오찬은, 관계의 변곡점에 놓인 양쪽의 생각과 정서를 잘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여러 가지 마음이 복잡합니다. 옛날엔 민주노총 가까이서 지지도 하고 개별적으로 도움 주기도 하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때때로 대립하기도 하면서 참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이 어렵기도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님, 무례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노무현 정부 출범 때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에게) 저는 인간 노무현을 신뢰하고 존중합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오른 노무현은 신뢰하기 어려울 겁니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대통령과 노동>, 권재철, 2011)

청와대 노동비서관으로 그 자리에 배석했던 권재철씨는 “그건 역으로 단 위원장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현장 노동자였던 단병호와 민주노총 위원장인 단병호가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서로 달라진 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노 대통령은 노동현장에 애정이 깊었지만, 한편으론 과거 노동운동을 봤던 시각으로 현재의 노동계를 대한 측면이 있었다. 노동계 역시 노 대통령을 그렇게 대했다. 대통령으로서의 고민은 고려하지 않고 ‘변했다’고만 비판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진보정권과 노동계는 철저하게 ‘기브 앤 테이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보수정권과는 타협의 여지가 별로 없으니 ‘투쟁과 대결’이 기본 구도다. 진보정권과 노동계는 그래도 서로 주고받을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브 앤 테이크’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걸 손에 쥘 수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주면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으리란 믿음, 10개 현안 중 핵심적인 2개를 합의하지 못해도 나머지 8개를 우선 받아들이려는 생각은 손쉽게 배척됐다.

이런 분위기는 진보정권이 노조를 ‘변화의 파트너’가 아닌 ‘적절한 관리대상’으로 본다는 생각을 노동 쪽에 심어줬다. ‘사회적 대화’에 의지를 보였던 김명환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가령 청와대와 현안을 논의하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노동부 등에 맡기고 (청와대는) 빠진다. 그 이후엔 ‘관리’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 정부는 하나하나씩 주고받기 하자는 식인데, 이건 노조 간부들에겐 거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이남신 서울노동권익센터 소장은 “거기엔 노동 쪽의 책임도 있다. 핵심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불완전한 타협은 할 수 없다고 하니까 노-정이 파트너로서 어려움을 함께 넘어서려는 생각은 사라진다”고 말했다.

노동계와 협력이 이뤄지지 못하자, 노무현 정부는 전체의 90% 가까운 비조직 노동자들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과 정책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민주노총, 한국노총과는 긴장과 대립을 감수했다. 2003년 8월29일 노 대통령과 이남순 한국노총 위원장의 만남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그런 기류를 드러낸다. 이남순 위원장이 “대통령이 그러시니까 정치권에서도 (노동계를) 홀대하는 거 같고 경영계가 가세하고 언론이 받아서 비난하고…, 우리로서는 총공세를 당하는 기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투쟁성이 강한 대기업 노조의 운동방식과 경향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대신) 비정규직, 교섭력이 약한 중소기업 노동자 문제 등에 오히려 정책을 집중하고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가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대통령과 노동>, 권재철, 2011)

노 대통령의 직설적인 어법은 노동계의 마음을 더욱 할퀴었다. 이남신 소장은 “노 대통령은 정규직 노조가 투쟁 성과로 높은 임금을 쟁취했는데도 그걸 밑으로 흘려서 (비정규직·중소기업 노동자들과) 연대를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노조는 기본적으로 대중조직이고 이익단체다. 이걸 이해하면서 연착륙을 시도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 대통령만큼 정규직 노조와 총연맹을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 참여정부-노동계 충돌의 여파를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이후 9년간의 보수정권 경험은 노동계도 변화시켰다. 과거와 달리, 한국노총은 물론이고 민주노총도 정부와의 충돌을 부담스러워한다. 양쪽 모두 조심스럽지만 이것이 사회적 대화와 타협으론 이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진보정권과 노동계는 갈등 속에 10년 전에 비해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7월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된 건 상징적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 다음 회엔 ‘진보정권과 노동’ 두번째 이야기 - 사회적 대타협의 조건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박찬수 |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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