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이건희..그렇게 떠났다[오동희의 思見]
고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이 타계한 지 49일째 되던 12월 12일 아침, 고려 8대 왕 현종이 1011년에 창건한 천년 고찰 진관사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다.
토요 휴일인데도 영하의 산 날씨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인적은 한산하다.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진관사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를 건너는 등산객들이 중간중간 해탈문을 들어서기도 하지만 평소에 비하면 드물다.
마른 물길을 오른쪽으로 두고 걷다 보면 '마음을 씻는 다리'인 세심교(洗心橋)를 만난다. 이 생의 나쁜 마음을 깨끗이 씻고 건너라는 건지? 그 너머 함월당에 들러 '마음을 깨끗이 씻고 나오라'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한 스무 걸음으로 그 세심교를 건너면 '달을 머금은 집' 함월당(含月堂)이 있다. 평소에는 템플스테이로 쓰이는 수련장이지만 이날은 이 생에서 78년을 치열하게 살다간 한 거인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곳이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49재가 열린 자리엔 고인의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차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이 회장의 일곱명의 손주 등 직계가족 12명만이 고인의 마지막 길, 명복을 빌었다. 치열하게 살다간 그 삶에 비해 마지막 이별은 단출하다.
49재는 고인이 타계한 날로부터 7일마다 7차례(49일)에 걸쳐 재를 지내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식으로 이날은 타계 후 일곱번째의 7일째 되는 날이자 49재의 끝이다.
윤회를 믿는 불교에선 사람이 죽으면 49일 안에 저승에서 이승에서의 업을 심판받는다고 믿는다고 한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육신 없이 혼령만 떠도는데 그 49일 동안 유가족이 공덕을 지으면 고인이 좋은 곳에 갈 수 있다고 믿어 49재를 지낸다.
고인은 지난 2014년 5월 10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72년을 더없이 치열하게 살았고, 다시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지막 6년여의 치열한 삶까지를 합치면 78년간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1987년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삼성전자를 반도체·스마트폰·TV 등의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올려놓으면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의 초석을 다졌다.
그가 취임할 당시 매출 17조 4000억원의 삼성그룹은 지난해 매출 314조원의 초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시가총액도 1조원에서 400조원을 훌쩍 넘길 만큼 커졌다.
때로는 성장에 기뻐하고, 때로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그는 그렇게 치열한 삶을 마감했다. 주변에서 그를 잠깐이나마 지켜본 입장에서 참 치열한 삶을 살다간 거인으로 기억된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자리에서 "제가 대한민국 전체를 다 먹여살릴 수 있다고는 장담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저를 믿고 한 방향으로 같이 가신다면 최소한 삼성 직원 15만명은 먹여 살릴 자신이 있습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의 그를 기억하는 전 삼성 고위임원들은 "이 회장께서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힘있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 적이 없다"며 "당시에는 신들린 듯 수백 시간을 변화와 혁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혼자 잘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고, 하청업체가 아닌 협력업체로 동반성장을 주장했고, 노사가 아닌 가족으로 직원들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자세로 기업 경영을 했다. 성공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임직원들과 사회 전체와 함께 일군 것이라고 했다.
그의 그런 뜻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짧게 나마 고인을 취재한 경험에선 인간 이건희는 깨어있었던 혁신가였고, '함께'를 아는 사회사업가였고, 전체를 생각하는 거인이었다.
2014년 5월 10일 밤 12시경 그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고 삼성서울병원을 새벽에 찾아갔을 때나, 또 지난 10월 25일 오전 9시경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같은 장소를 찾았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었던 이유다.
진관사 세심교 앞에서 아직도 초일류 기업을 말하던 젊은 시절 이건희 회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는 아직 못다 이룬 기업가로서의 숙제를 후대에 남기고 조용히 그렇게 떠났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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