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들,3] 이보람 마틸다와 박시진 엘리사벳의 사정

한겨레 2020. 12. 9. 18: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 초단편소설, 들]#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2018년 7월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 판결과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총집중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팔에 낙태죄의 근거인 형법 제269조 제1항의 폐지를 주장하는 그림을 새겼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바로가기 :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www.hani.co.kr/arti/delete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이보람 마틸다와 박시진 엘리사벳의 사정 ㅣ 문녹주

낙태죄 폐지 운동 단체의 전업 활동가인 이보람 마틸다는 벌써 3년째 막내 이모이자 수녀인 박시진 엘리사벳과 의절하고 지냈다. 할머니 장례식장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서로가 죽은 사람인 양 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를 피할 길이 없었다. 여기는 경찰서 유치장이었고 두 사람은 폭행 혐의로 체포된 차였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낙태죄 폐지 공청회장에 낙태죄 존치론자들이 플랜카드를 들고 난입했다. 기나긴 대치 끝에 결국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최전선에 나섰던 양측 활동가 일부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보람과 시진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욕설을 주고받다가 나란히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 셈이었다.

보람이라고 해서 막내 이모와 원래 앙숙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자주 왕래하고 지냈다. 시진은 할머니가 늦게 본 막둥이였고 보람의 엄마인 박나진 레지나는 세 자매의 맏이였다. 일하느라 바쁜 부모님 대신 보람을 기른 건 할머니였다.

시진은 그 무렵 나진의 집에 얹혀살며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도서원 같은 건 생각도 않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고 했다. 없는 집 막내딸로 태어나 이룩한 대단한 성과였다고, 보람의 할머니는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신앙심 깊은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딸이 주님의 신부가 된 것 역시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할머니가 보람의 가장 오래된 친구라는 사실을 보람이 깨달을 때쯤이었다. 보람의 할머니는 폐렴으로 입원 중 사망했다. 장례 미사는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엄격한 천주교식으로 치러졌다.

장례 미사 이틀째에 사달이 일어났다. 염습실 안에 초를 밝히고 고인께 마지막으로 한마디씩 하는 자리였다. 보람은 흐느끼느라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었다.

“내가 여자랑 결혼하는 거 보고 가신댔잖아. 좋은 여자 만나는 거 보고 간댔잖아.”

그러자 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이모한텐 말 안 했는데 나 레즈비언이거든. 할머니도 알았어. 이모만 빼고 사실 다 알아. 내가 좋은 여자 데려온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보람이 눈물을 그치기도 전에 시진이 한탄하듯 말했다.

“세상에. 내가 널 위해 기도해야겠다.”

거기서부터 난리가 시작됐다. 두 사람은 말꼬리를 잡던 끝에 말싸움에 이르렀고 끝내 운구를 끝낸 뒤 의절을 선언했다. 맏이인 나진이 딸과 막냇동생이 가족 모임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일정을 조율했다. 탁월한 사전 공작 덕에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잘 지낼 줄로만 알았다. 의절한 이모와 일하다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번에도 정리는 박나진 레지나 씨 몫이었다. 나진은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의 신원보증인이 됐다. 수도회에서 따로 사람이 올 거라며 한사코 거절하던 시진도, 뭐 좋은 꼴을 더 보겠느냐는 얘기에 수긍하고 함께 나왔다. 시진은 수도회에 연락하고 보람은 엄마 차 조수석에 올라타는 걸로 그날 하루가 저물어갔다.

나진이 시동을 걸며 여상하게 말했다.

“너 막내이모 장학금 받아서 미국 유학 가려던 거 기억나?”

“갑자기 그건 왜?”

보람은 미간을 팍 찌푸렸지만 나진은 여전히 야식 메뉴를 상의하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못 간 이유는 모르지?”

“왜, 무슨 해코지라도 당했어?”

“해코지라면 해코지려나. 연구실 동료하고 연애했는데, 막내가 유학 준비 다 끝낼 무렵에 애가 덜컥 들어섰지 뭐야. 남자한테 얘기하니까 장학금 자기한테 양보하고, 결혼해서 같이 미국 가서 살자더래. 학위는 자기 먼저 딸 테니까 너는 천천히 따라고. 네가 생각해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나진은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내가 막내 데리고 병원 갔지. 막내는 몸조리하느라 유학 포기했고. 유학은 결국 그 새끼가 갔다더라. 그러고 백일을 집에서 앓다 일어나서는 수녀가 되겠다는 거야.”

보람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새끼는 그럼 지금 뭐하는데?”

“나도 몰랐는데, 너 취직하고 나서 알았어. 너네 재단 이사장이더라. 검색해 보니까 낙태죄 폐지 운동도 아주 활발하게 하더만. 언행일치 확실하게 하는 인생이구나, 싶었지. 박시진 엘리사벳 자매님 너무 미워하지 마.”

보람은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사장의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작은 재단이다 보니 얼굴 마주칠 일도 많았다. 조수석에 앉은 채 괜히 차창 밖을 두리번거렸다. 가로등과 주행등과 간판이 눈부시게 빛나는 와중, 모녀가 탄 차 안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문녹주

작가의 말

인공임신중절에 반대하는 프로라이프 운동이 갓 한국에 수입됐을 무렵 , 공교롭게도 나는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 이제 와 돌이켜 보면 프로라이프 운동이 한국에 퍼진 양상은 좀 수상한 구석이 많았지만 , 하여간 나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켜내려 애썼던 전장의 새내기 병사였던 셈이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다가 어느 순간 깨닫고야 말았다 . 어디든 최전방에는 여자들이 부딪히고 있었다 .

시간이 지났다 . 천주교 일각에서는 인공임신중절 경험자를 위한 피정을 진행한다고 한다 . 미사 도중 인공임신중절 경험자를 공공연하게 모욕하는 사제를 비판하는 이도 있다 . 먹는 인공임신중절약 미프진이 허용되었으며 , 낙태죄를 폐지하기까지는 딱 한 계단 남은 것처럼 보인다 . 나는 그 한 계단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오르고 싶다 .

작가 소개

문녹주 . 양성애자 . 여성 . 2019년부터 스릴러 단편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 , SF 단편 〈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 〉 , 〈어머니의 도원향 〉 등을 발표했다 . 현재 SF-역사 대하 장편 《아름다운 비나이다와 그녀의 짐승들 》 출간 작업 중이다 . 문의 : toni@grb-agency.com

※ <한겨레>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작품을 게재합니다. 해당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발췌 및 전재를 금합니다.

▶바로가기: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www.hani.co.kr/arti/delete

▶바로가기 :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셀렉션

https://britg.kr/novel-selection/125961/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