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구평族과 대깨族
지구는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 국제 콘퍼런스가 올해도 어김없이 열렸다. 한 달쯤 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소도시에 100여 명이 모여 지구가 평평하다는 자신들의 각종 ‘증거’ 자료를 열정적으로 주고받았다. 지구는 밑이 평평한 원반 형태이며, 원반 중심에 북극이 있고, 바닷물이 넘쳐 흐르지 않도록 원반 가장자리를 40~50m 높이 빙벽이 둘러싸고 있어 이를 남극으로 부른다는 유의 주장이 이어졌다.
미국 성인 8215명에 대한 2018년 유고브 설문에서 2%는 ‘지구는 평평하다’고 했고, 5%는 ‘이전까지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는데 요즘은 의심이 든다’고 답했다. 2019년 브라질 사람 2086명에 대한 다타폴랴 조사에서 7%는 ‘지구는 평평하다’고 했다. 서울에서도 평평지구 콘퍼런스가 재작년 열렸다. 과학의 시대가 분명하지만 지구(地球)가 평평(平平)하다고 믿는 사람이 의외로 적지 않다. 이들을 ‘구평족(球平族)’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평족은 자신의 눈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지구는 평평하다고 한다. 땅도 평평하고, 호수도 평평한데 지구가 둥근 게 말이 되느냐는 식이다. 그들은 직감과 감정을 신뢰하며, 다수설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신들의 사고방식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기 위해 사제(私製) 로켓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추락하는 열혈 구평족도 있다. 그러다 목숨을 잃기도 한다.
구평족은 끊임없이 논거를 개발한다. 민항기들의 실시간 비행 경로를 보여주는 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를 보면 남극을 가로질러 항행하는 항공기가 전혀 없다. 남극을 지나면 낭떠러지이기 때문에 비행기가 다니지 않는 것이며 지구가 평평하다는 명확한 증거라고 구평족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비행기가 남극을 피하는 것은 민항기 안전 규정 때문이다. 엔진 두 개 중 하나가 고장 날 경우 일정 시간 내에 비상착륙을 해야 하는데, 남극 언저리에 누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비상공항을 만들겠는가. 이런 설명은 구평족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지구 궤도에 오른 수많은 우주인 증언은 구평족들에게 거대한 음모의 하나일 뿐이다.
학력 차이가 구평족을 만드는 건 아니다. 텍사스공대 연구진은 2017년 노스캐롤라이나, 2018년 콜로라도에서 열린 콘퍼런스 참석자 30명을 인터뷰했다. 이 중 60%가 대졸 이상이었다. 미국 대졸자 비율(46%)을 뛰어넘는다. 30명 중 29명은 유튜브에서 관련 동영상을 본 뒤 구평족이 됐다고 했다. 한 명만 딸과 사위 덕에 입문했다고 했는데, 그 딸과 사위도 유튜브로 구평족이 됐다 하니 모두 유튜브가 영향을 준 셈이다.
예전에는 점처럼 흩어져 있던 구평족들이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 덕에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됐다. 구평족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안온하다. 사용자 체류시간을 늘려야 하는 소셜미디어는 구평족 구미에 맞는 연관 게시물을 연속 추천하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구평족의 확증 편향 강화에 일조했다.
구평족 비슷한 사람들이 주변 어디에나 있다. 좋아하는 지도자가 하시는 일은 대가리가 깨져도 옹위해야 한다는 ‘대깨족’이 대표적이다. 겉으론 멀쩡한데, 제도와 권위를 불신하며, 신념을 고집하고, 무리를 지어 세를 과시한다. 앞으로 대깨족이 더 늘어날 것 같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대깨트’까지 이 대깨족 무리에 합류했다. 그런데 대깨족은 구평족보다 해로울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적어도 구평족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진영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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