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클리프 리드, KBL 외인 시대 문을 열다 (2)

김영훈 2020. 11. 2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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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10월호에 실렸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독 링크)


1997년, KBL은 출범과 동시에 외국 선수 제도를 도입했다. 첫해 수준급 외국 선수가 쏟아진 가운데, 많은 화제를 모은 선수는 클리프 리드(190cm)였다. 그는 단신의 키에 뛰어난 운동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지난 바스켓코리아 웹진 9월호에서는 리드의 이야기를 짚어봤다. 하지만 분량으로 인해 한 편에 모든 이야기를 담지 못했다. 그래서 10월호에 2편을 준비해 보았다.

리드, 기아와 한 번 더!
원년 우승팀이었던 부산 기아는 KBL 두 번째 시즌,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정상 자리를 지키지 못했던 그들은 이후 급격한 변화와 마주했다. 팀의 상징과도 같던 허재를 원주 나래(현 원주 DB)로 보냈다. 1990년부터 지휘봉을 잡았던 최인선 감독과도 안녕을 고했다.

대신 사령탑에 앉은 이는 코치로 재직 중이던 박인규 감독. 그는 리드와 다시 한 번 손을 잡았다. 여기에 허재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제이슨 윌리포드를 영입했다. 윌리포드는 KBL 초창기 2년 동안 리드와 함께 최고의 외국 선수 자리를 다퉜던 선수였다.

이로써 강동희와 김영만, 정인교에 윌리포드, 리드가 한 팀에 모인 것이다. 탄탄한 라인업을 갖춘 기아가 1997시즌의 영광을 되찾아오는 것도 매우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기아는 1라운드 7승을 차지하면서 순조롭게 1998-1999시즌을 시작했다. 리드는 라운드 평균 21.3점을 13.4리바운드 1.8블록슛을 기록하며 여전한 활약을 과시했다.

하지만 기아의 상승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리드가 모친상으로 인해 미국에 다녀온 뒤 좀처럼 컨디션을 찾지 못했다. 이후에도 상대의 집중견제 탓에 심판과 싸우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윌리포드 역시 같은 문제로 인해 이전에 비해 저조한 활약을 보였다. 믿었던 외인들이 부진한 기아는 중위권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위기에 빛난 기아였다. 국내 선수들이 그들의 명성에 걸맞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팀을 이끌었다. 로드와 윌리포드가 다시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도 힘이 되었다. 상승세를 탄 기아는 시즌 막판 9연승을 달리며 2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정상을 두고 현대와 다시 만나다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기아는 수원 삼성을 만났다. 삼성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강동희-리드-윌리포드로 이어지는 삼각편대는 연일 맹활약을 펼쳤고, 3승 1패로 손쉽게 제압했다. 삼성에게는 문경은(현 SK 감독)이 터지지 않았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결승에서 기아를 기다리는 상대는 대전 현대. 2년 연속 결승에서 같은 매치업이 성사된 것이다. 기아가 설욕에 성공할지, 현대가 정상을 지킬 수 있을지,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뜨거운 열기 속에 열린 챔프전이 열리기 직전. 정상탈환을 노리는 기아에게 악재가 찾아왔다. 김유택이 발목 인대에 부상을 입었다. 김유택이 빠진 기아는 현대에게 1차전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리드 또한 재키 존스와 조니 맥도웰 콤비에게 막히면서 15점 9리바운드에 그쳤다.

1차전을 내준 기아는 2차전, 패배를 갚아줬다. 리드의 활약이 기반이었다. 1차전 아쉬운 모습을 만회라도 하듯 26점을 퍼부었다. 리바운드도 11개나 걷어내며 더블더블을 작성했다.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2차전 이후 기아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3,4,5차전을 내리 패배하며 현대에게 우승 트로피를 빼앗겼다. 윌리포드의 부상이 뼈아팠다. 왼쪽 발목을 다친 윌리포드는 제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유택의 ‘진통제 투혼’도, 3경기 평균 25.3점을 기록한 리드의 고군분투도 팀을 구하기는 불가능이었다.

기아는 2년 연속 정상을 목전에 두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리드 역시 맥도웰이라는 새로운 센세이션 앞에 무릎을 꿇었다.


SBS와 손잡은 리드, 슬픈 결말을 맞다

두 번 연속 준우승에 그치자 기아는 변화를 선언했다. 박인규 감독 대신 박수교 감독을 선임했다. 외국 선수도 바꿨다. 3년간 팀에서 활약했던 리드와 재계약 하지 않았다.

소속팀이 없던 리드는 3년 만에 트라이아웃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미 약점도 파악됐고, 심판 판정과 관련해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던 리드. 그러나 세 번의 시즌 동안 팀을 챔프전 무대로 견인했던 그의 공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체 4순위였던 안양 SBS가 리드를 붙잡았다. 팀은 바뀌었지만, 리드의 기량은 그대로였다. 1라운드에서 18.8점 9.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전 시즌들에 비해 저조한 수치였으나, 리드가 팀의 희망이었던 것은 변함없었다.

문제는 기록이 아니었다. 리드의 경기 태도였다. 직전 시즌부터 보여줬던 심판 판정에 대한 지나친 항의가 더욱 자주 보여졌다. 게다가 손가락 부상까지 당하면서 리드는 점점 내리막을 걸었다.

리드가 손가락 부상 재활에 시간을 보내던 2000년 1월. SBS는 리드를 퇴출하겠다는 깜짝 소식을 발표했다. SBS가 발표한 원인은 ‘불성실한 태도와 인성 문제’였다. 하루아침에 특급 기량을 가졌던 외국 선수가 퇴출이라는 최악의 결말로 떠나게 된 것이다.

사실 리드의 문제는 당시가 처음이 아니었다. 기아 시절에도 시즌을 거듭하면서 점점 불성실한 모습을 드러냈다.

기아 매니저를 맡았던 정상일 현 인천 신한은행 감독은 “리드가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몸관리에 철저했다. 커피도 마시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 생활에 적응하더니 식단 조절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술도 매우 자주 먹었다. 그 정도로 방탕해졌다. 운동능력으로 좋았던 선수였는데, 몸관리가 안 되니 서서히 기량이 떨어지더라. 다른 팀이어서 자세히 모르지만, 리드가 퇴출되었던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KBL 초창기 최고의 기량을 갖췄던 것으로 평가되었던 리드는 결국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KBL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지난 현재, 리드의 경기력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엄청난 점프력을 갖춘 선수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엔딩은 임팩트 있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진 제공 = KBL

바스켓코리아 / 김영훈 기자 kim95yh@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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