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진정한 맛은 장이 좌우 .. 전통장의 세계화 이뤄낼 것" [나의 삶 나의 길]

최현태 2020. 11. 2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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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기순도 이사장
장흥 고씨 양진재파 종가 10대 종부
보통 1년에 20차례 제사·차례 지내
집엔 식혜·나물 등 음식 끊이지 않아
'진장' 분야서 유일한 전통식품명인
370년 넘은 씨간장 항아리가 보물
트럼프 방한때 만찬 오른 갈비 화제
죽염 만들던 남편 덕에 손맛 알려져
유명 온라인 마켓서 잇단 공급 요청
국내 넘어 2021년 2월엔 아마존 론칭
2018년 프랑스서 열린 국제식품전시회
장 맛본 해외 유명셰프들 "판타스틱"
파리에 장 담그는 공간 마련하고 싶어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 기순도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이사장이 전남 담양 장흥고씨 양진재파 종가에서 마당을 가득 채운 장 항아리를 살펴보며 밝게 웃고 있다. 기 이사장은 한식의 진정한 맛은 장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전남 담양의 고요한 산촌 마을. 대문을 들어서자 맛있게 익어가는 장 냄새가 은은하게 퍼진다. 오랜 세월 마당을 지키는 항아리 1200여개. 그리고 바람 따라 서로 부대끼며 늦가을을 연주하는 풍경이 매달린 고풍스러운 기와집은 이곳이 종가임을 알린다. 풍경소리에 인기척을 알아챘는지 산골까지 찾아오느라 고생했다며 달려 나오는 주인장의 얼굴은 손님을 맞는 반가움으로 가득하다. 마침 오늘 이른 김장을 했다며 김치부터 내어 놓는다. 젓갈을 쓰지 않고 간장으로 맛을 낸 김치를 쭉 찢어 한입 베어 물자 아삭한 식감과 입안에 퍼지는 깊고 자연스러운 장맛에 감탄이 절로 난다. 입맛 까다로운 프랑스 파리 미식가들을 사로잡은 이유를 알겠다. 3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를 이어 전해지는 씨간장을 보존하고 있는 ‘진장’ 분야 유일한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 기순도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이사장. 진정한 한식의 맛은 장에서 온다는 명인을 따라 우리 음식의 깊이를 더하는 장맛의 오묘한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파리 스타 셰프들 입맛 홀린 명인의 장맛

201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식품전시회(SIAL). 약 200개국 7200여 업체가 참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식음료 및 식품산업 박람회다. 매년 바이어와 방문객 17만명이 찾는 이 행사의 VIP초대행사에 주요 바이어와 유명 셰프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딸기고추장, 간장, 된장, 부각 등을 맛본 이들은 하나같이 “판타스틱”을 외쳤다. 그들이 반한 맛은 바로 기순도 명인의 솜씨다. “딸기고추장이 프랑스 사람들 입맛에도 잘 맞았나 봐요. 언어는 안 통해도 맛으로 통하더군요. 간장이 가장 인기 있었어요. 콩, 죽염, 물로만 만들었는데 오묘한 생선 맛이 느껴진다고 해요. 370년이 넘은 씨간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오랜 전통에 다들 깜짝 놀라요. 조상들이 만들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인데.” 파리 공연 중이던 BTS가 특별무대를 꾸민 VIP 행사에서 명인은 직접 한국발효식품의 우수성을 설명했다. 특히 프랑스 유명 요리사이트 ‘750g’를 운영하는 ‘국민 셰프’ 다미앙(Damien)이 명인의 장을 활용한 음식들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첫해 인기에 힘입어 2019년에는 김치까지 가져갔다. 남도는 주로 젓갈을 많이 사용하지만 명인은 장으로만 김치를 담갔다. 약과와 조청도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명인의 손맛이 프랑스에 소문나면서 2019년 8월 프랑스 파리 봉마르쉐 백화점이 명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명인의 간장 등이 한국 식품 최초로 이 백화점에 입점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봉마르쉐 백화점은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자 세계 식품의 유행을 선도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간장과 고추장, 죽염이 먼저 소개됐고 나중에 김치전도 추가됐어요. 물만 부으면 반죽이 저절로 이뤄져 간단히 부쳐 먹기만 하면 되는 제품이에요. 아무리 오래되고 쉬어도 김치 먹고 병이 나지는 않아요. 아마 치즈 등 발효음식을 즐기는 프랑스인들의 입맛에 잘 맞았을 거예요. 덕분에 우리 발효 음식이 프랑스에 많이 알려지면서 봉마르쉐 백화점의 일본관 2곳 중 한 곳이 한국관으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음식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한식의 진정한 맛은 장맛에서 온다

마당에 가득한 항아리 중 명인이 가장 아끼는 항아리가 하나 있다. 바로 370년이 넘은 씨간장 항아리다. “신기하게도 씨간장 항아리는 절대 곰팡이가 피지 않아 교체하지 않고 대대로 쓰고 있답니다. 뚜껑을 열면 향부터 달라요. 맛도 아주 진하고 깊죠. 매년 빚은 제일 좋은 간장을 조금씩 첨가해서 보존하는데 제사나 명절 때만 쓰는 집안의 아주 귀한 장이에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방한 때 만찬에 오른 한우갈비에 바로 명인의 씨간장이 사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순도 명인은 2008년 ‘진장(陳醬)’ 분야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35호)으로 선정됐다. 오래 묵혀 맛과 향을 더한다는 뜻으로 ‘더할 진’ 자를 쓴다. 실제 명인의 진장은 최소 5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간장은 1년에 딱 한 차례만 만드는데 우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 뒤 동짓달(음력 11월)에 메주를 쒀 섣달(음력 12월)까지 한 달 정도 발효하고 정월(음력 1월)에 죽염수와 메주를 항아리에 함께 넣어 장을 담근다. 보통 60∼70일이 지나면 메주를 건져 된장을 만들고 남은 물은 간장이 된다. 하지만 명인은 염지를 1년이나 진행한다. 또 4년은 더 숙성시켜야 비로소 진장의 타이틀을 얻는다. “궁중에서는 5년짜리 장만 사용했을 정도로 예로부터 좋은 장은 5년을 묵히면 약으로 여겼어요. 매년 진장을 만드는데 11년 정도 묵힌 진장도 있습니다. 세월이 꼭 맛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되면 장은 깊고 부드러운 맛이 난답니다.”

맛있는 장을 만드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간장을 만드는 과정이 10가지라면 한 가지만 소홀해도 그 맛이 변하기에 오랜 시간 엄청난 정성이 필요하단다. 이런 정성 가득한 장은 한식의 맛을 제대로 내도록 돕는다. “시어머니에게서 전수받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장을 빚어요. 한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장이랍니다.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고 하는데 남도로 내려갈수록 항아리가 펑퍼짐하고 커집니다. 장을 많이 담가서 음식 맛이 좋은 것이죠. 보통 간장 맛을 보면 그 집 음식 맛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좋은 간장일수록 음식이 맛있답니다. 좋은 간장은 메주의 양이 좌우해요. 부잣집 음식이 맛있는 것은 메주가 풍부하게 들어간 간장을 쓰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형편이 어려운 집은 간장이 없어 소금으로 간을 했죠. 소금은 그냥 짠맛만 나지만 간장은 감칠맛이 나요. 맛있는 간장만 있으면 육수나 채수를 따로 내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답니다.”
#종가 맏며느리로 사는 법

기순도 명인은 장흥 고씨 양진재파 종가의 10대 종부다. 종가의 맏며느리.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힐 것 같다. 요즘은 1년에 보통 20차례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데 많이 줄어든 것이 이 정도란다. 대대로 전해지는 고문서에는 친척들의 제사일까지 모두 적혀 있다니 말 다했다. 앞서 간 맏며느리들의 삶이 그려진다. 명인의 젊은 시절도 녹록지 않았을 것 같다.

곡성이 고향인 명인은 부유한 집안의 1남5녀 중 막내로 자라 처음에는 종가 맏며느리 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혼수로 TV를 가져갔는데 워낙 산골이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더란다. “제가 힘든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딸을 종가에 시집보냈다고 주변에 자랑하더라고요. 워낙 상을 많이 차리다 보니 처음에는 내가 식모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혼 전 식모가 해주는 음식만 먹던 터라 더 서러웠죠. 하지만 시아버지가 큰 힘이 됐어요. ‘너가 해준 음식은 다 맛있다’고 며느리 기를 살려줬어요.”

워낙 손님상을 많이 차리다 보니 명인의 집에는 늘 음식이 끊이지 않는다. 식혜를 고아 만든 조청에 버무린 무정과, 약과, 당근 등 주전부리로 시작해 고기·깻잎·가지전, 고사리·시금치·무나물, 돼지 수육에 삭힌 홍어까지. 마치 명절 때나 보는 상이 매일 차려진다. 또 손님이 자주 찾는 종가여서 오래전부터 커피 대신 직접 만든 식혜를 대접했다. 쌀을 많이 넣고 감초로 단맛을 내는데 은은한 단맛이 질리지 않는다. 덕분에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아 목포 등의 초중고교에 급식용으로 제공될 예정이다.

차례와 제사용 음식을 만들던 명인의 손맛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 덕분이다. 종가 소유 대나무밭에서 오랫동안 죽염을 만들던 남편은 우연히 유기농 콩 50가마로 된장을 만들었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에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죽염간장, 죽염된장, 부각을 만들어 백화점에 내놓았는데 불티나듯 팔렸다. 입소문이 나더니 유명 온라인 식품마켓에서 공급을 요청했고 아마존에서도 연락이 와 내년 2월에 론칭할 예정이다.

#미식 성지 파리에서 직접 장 담그는 꿈을 꾸다

기순도 명인 종가 마당에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하나 있다. 지하 160m에서 미네랄 가득한 물을 끌어올리는 곳이다. 좋은 물과 단백질이 풍부한 콩, 소금 대신 죽염으로 만들어진 장은 항아리에 담긴 뒤 번호를 부착해 몇 년도산 간장·된장인지 표시된다. 마치 연도별로 구분해 셀러의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와인과 비슷하다. 대기업과 명품된장 개발에도 나섰는데 이런 품질관리를 통해 1㎏에 30만원짜리 명품장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장이 가장 맛있을 때 저온 창고로 옮겨 천천히 숙성하는 방법도 연구 중이다. 여름에 항아리가 엄청 뜨거워져 수분이 빠져가며 진장이 되지만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명인은 잊히는 전통장을 지키려고 지난해 사단법인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 우리 전통간장을 표준화해 등재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예요. 전통장을 통해 진정한 한식의 세계화를 이루려는 원대한 꿈이죠. 전통장의 정체성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식당에서 먹는 장은 전통장이 아니에요. 일제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장공장을 세워 72시간 만에 대규모로 만들어내던 제품이 지금까지 식단을 점령하고 있어요.” 연구회는 현재 100여명이 가입돼 전통장의 정보를 교환하고 보존하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명인은 아파트 문화로 일반 가정은 물론 종가들의 장독대마저 사라지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단다. 이에 종가의 장독대를 복원하는 사업을 구상 중이다. 종가의 음식문화 복원은 장독대 복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명인은 파리에 땅을 사서 직접 항아리에 장을 담그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꿈이다. “사람들이 저 보고 대단하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 조상들이 대단한 겁니다. 한식은 제가 개발한 것도 아니잖아요. 다만, 후손들이 이를 제대로 활성하지 못한 것이죠. 말로만 한식의 세계화 외친다고 이뤄지나요.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미식이 발달한 프랑스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파리에 뭔가를 심어야 세계화가 되지 않을까요.”

담양=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기순도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이사장은… ●1949년 전남 곡성 출생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장흥고씨 양진재파 종가 10대 종부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 제35호(진장) ●한국전통장보존연구회 이사장 ●한국여성소비자연합 장학재단이사장 ●고려전통식품 명예 회장 ●1992년 고려전통식품 창립 ●2001년 담양군 신지식인 선정 ●2003년 농림부 장관상 수상 ●2009년 문화체육부 국제요리경연대회 대상 ●2010년 기순도 전통장 명가 우수체험공간 지정 ●2016년 대통령 산업포장 수상·프리미엄 국가브랜드 우수문화상품전통간장 지정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국빈 만찬 씨간장 제공 ●2018~2019년 파리 국제식품전시회(SIAL) 참가 ●2019년 프랑스 파리 봉마르쉐 백화점 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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