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뼛속까지 사무치는 노래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2020. 11. 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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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계에서 사는 일은 고단하다. 벨기에의 바를러 헤르토흐와 네덜란드의 바를러 나사우는 두 나라 국경에 놓인 하나의 마을이다. 마당과 도로에도 국경선이 있다. 좋은 날에는 이웃끼리 어울려 지내며 큰 불편이 없지만 올해는 감염병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같은 골목인데 왼쪽 집은 벨기에의 방역수칙, 오른쪽 집은 네덜란드의 방역수칙에 따라 통제받으며 격리와 이송 절차도 제각각이라 혼란과 위험이 높아졌다. 위기가 오면 접경 지역엔 긴장이 감돈다. 힘겨루기라도 벌어지면 약한 이들이 먼저 희생된다. 예나 지금이나 세력과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현장에서 고통은 그곳을 지켜야만 살아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옛이야기로 잘 알려진 독일의 브레멘도 분쟁의 중심에 있었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위치가 좋아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30년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키려 했지만 실패했고 나폴레옹의 점령을 겪었으며 2차 세계대전에는 강제수용소가 설치됐다. 영주들의 핍박을 피해 중세의 농노들이 가장 많이 도망쳐온 자유의 도시이며 오늘날도 인구의 대부분은 노동자다. 독일에서 녹색당이 가장 먼저 의회에 진출한 곳도 여기다.

네 마리 동물이 만든 ‘브레멘의 음악대’는 이런 역사를 상징한다. 평생 충성을 다했지만 주인이 자신을 당나귀 고기로 만들 것임을 눈치채고 달아나던 당나귀는 퇴역 사냥개를 만난다. 고양이는 이빨이 닳아서 쥐를 못 잡는다고 끓는 물에 던져지기 직전에 도망친다. 뼛속까지 사무치게 울 줄 아는 닭도 있다. 곧 손님의 식탁에 오를 운명이었다. 그들 넷은 일행이 되어 “어딜 가든 죽는 것보다 나을걸”이라고 입을 모은다. 착취의 끝이 폐기처분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자유를 얻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브레멘으로 가던 동물들은 우연히 도둑들의 요란한 만찬 현장을 본다. 그들은 저건 우리들이 먹었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동물 친구들은 힘을 합해 도둑을 쫓아내고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우리 곁의 당나귀와 개와 고양이와 닭은 누구이며 그 삶은 어떨까. 유설화의 그림책 <밴드 브레멘>에는 연구소의 실험용 동물이었던 개와 경마장에서 쫓겨나 관광마차를 끌던 말, 밤낮없이 달걀을 낳아야 했던 암탉과 유기된 집고양이가 나온다. 이들은 쫓겨난 비정규직 젊은이들과 어울려 밴드 브레멘을 결성하고 고래섬 음악축제에 참가한다. 감춰지고 버려지고 지워진 존재에 대한 노래를 함께 부른다.

또 다른 작품, 루리의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모범운전자였던 당나귀 기사가 해고 통보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식당 서빙을 하던 바둑이, 산업 재해를 겪고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하던 고양이 점원도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다. 두부 노점을 하는 꼬꼬댁은 행정 명령을 받고 쫓겨난다. 이들은 지하철 같은 칸에 앉아 나란히 한강철교를 건넌다. 계단이 가파른 마을을 헤매며 하룻밤 머물 곳을 찾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버린 사람들을 만난다.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네”라며 서로 넋두리를 주고받는다.

코로나19 일일 확진자가 500명대에 접어들면서 불안한 겨울을 예고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생명을 위협하는 것만큼이나 생계와 생존의 위협도 커진다. 긴급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할 정치세력들이 선을 가르고 충돌하며 이익을 셈하는 사이에 누군가는 내일의 일당을 약속받지 못하고 브레멘의 음악대처럼 겨울 거리를 떠돈다. 떠들썩한 세금 걱정도 먼 동네 이야기다. 그림책 속 동물과 사람들도 브레멘에는 가지 못했다. 그러나 손에 쥐었던 두부와 참치캔과 김치와 삼각김밥으로 ‘오늘도 멋찌개’라는 작은 식당을 차린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빈손의 시민들은 무엇을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위기는 가장 취약한 곳을 겨누며 절박한 사람들은 하루가 간절하다. 긴 다툼을 지켜볼 여력이 없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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