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쭤린 "마적 출신 군관 민폐 극심" 왕융장에게 개혁 특명
경찰국장 이어 재정청장에 임명
광산개발·무역으로 '곳간' 넘치자
장쭤린, 동 3성 독립 선포하고
군수공장 설립, 4년제 대학 세워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3〉
진저우의 거상이 왕씨 형제라면 사족을 못 썼다. 금쪽같은 두 딸을 형제에게 출가시켰다. 사돈 왕커쳰에게도 잡화점을 차려줬다. 융차오는 성미가 불같았다. 기다리던 관직 발령이 수포가 되자 관청에 불 지르고 자살했다. 융장은 뇌물의 중요성을 모르던 동생의 죽음에 충격이 컸다. 관직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의학연구에 몰두했다.
왕융장, 부패 경찰 추려내 공개 처형
고향으로 돌아온 왕융장은 약방을 차렸다. 당시 진저우의 약방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융장은 파산했다. 의서(醫書) 집필로 시간을 보냈다. 장모는 전형적인 동북 여자였다. 허구한 날 개떡 같은 사위들 골라왔다며 남편의 멱살을 잡았다. 장인은 할 말이 없었다. 왕융장을 데리고 가출했다. 독서에나 열중하라며 펑톈 교외에 오두막집을 구해줬다.
1915년 10월 15일, 장쭤린은 대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동3성에 파견한 진안상장군(鎭安上將軍) 돤즈꾸이(段芝貴·단지귀)의 대표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했다. 6일간 머무르며 경복궁에서 열린 물산공진회를 참관하고, 조선총독 데라우치와 두 차례 회담했다. 적극적인 친일을 표방해 환심을 샀다. 이듬해 6월, 2개월 전 장쭤린을 펑톈성독군 겸 성장에 임명한 위안스카이가 세상을 떠났다. 10월에는 조선에서 좋은 인상 남긴 데라우치가 총리로 도쿄에 부임했다.
경찰청장 왕융장은 부패 경찰 18명을 추려냈다. 공개 처형하고 시신을 3일간 폭시(暴屍)했다. 군기가 바짝 든 경찰들이 도박장과 아편굴을 급습했다. 군관이건 사회 명사건 무조건 체포했다. 무장군인들이 동료를 석방하라며 경찰청으로 몰려왔다.
장쭤린 “일본 배우되, 농락 당하진 마라”
장쭤린이 보기에 왕융장은 경찰 재목은 아니었다. 차분하고 민첩한 사람이 무장한 경찰을 지휘하다 보니 마적보다 더 거칠었다. 경찰복 오래 입었다간 사람 버리겠다며 재정청장을 맡겼다. 왕융장은 장쭤린의 돈 보따리였다. 광산개발과 무역으로 2년 만에 펑톈성의 채무를 상환하고도 남았다. 장쭤린은 곳간이 채워지자 하늘을 넘봤다. 1922년, 동3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4년제 대학과 군수공장 설립을 위해 왕융장을 펑톈성 성장에 임명했다.
“오사카에 있는 군수공장에 버금가는 병기공장을 만들자. 외국 기술자들을 동북으로 초빙해라. 인재양성 없이 군사력만 증강하면 폭력집단으로 전락한다. 4년제 대학을 설립하고 우수한 교수들을 모셔와라. 동북은 독일과 프랑스를 합친 것보다 넓다고 들었다.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다. 이민을 권장하자. 여비와 주거지 부담할 테니 누구나 와서 살라고 해라.”
왕융장은 귀가 번쩍했다. 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에는 실업자로 전락한 병기 기술자들이 거리에 널려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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