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방한의 대미 메시지는 '탐색'과 '견제'

김지은 2020. 11. 2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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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는 전략적 관계 강화로 미국 경도 상쇄
박병석 국회의장이 27일 국회 사랑재에서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접견하고 있다. 연합뉴스

1년 만에 방한한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27일 오후 귀국했다. 그의 행보를 둘러싼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것은 미국 신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그를 통해 중국이 발신할 메시지 때문이었다. 속내까지야 알 수는 없지만 왕 부장의 발언에 비춰보면 중국의 대미 메시지는 일단 탐색 속 견제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는 전략적 관계 강화를 통해 미-중 관계 속 ‘중립화’를 꾀하는 모양새다.

25일 밤 입국한 왕이 부장은 2박3일 동안 문재인 대통령, 강경화 외교부 장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윤건영 의원 등 여권 핵심 인사를 비롯해 한국 내 대표적 ‘미국통’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에 ‘중국통’ 박병석 국회의장까지 두루 만나고 떠났다. 공개된 내용 중 왕 부장이 만남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한 말은 코로나19 상황이 끝나지 않았지만 “중-한 양국의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 방한했다는 것이었다. 또 코로나19 방역을 둘러싼 협력도 매번 강조했다.

눈길을 끌었던 건 왕 부장이 한 차례도 미국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은 점이다. 미국에 대한 비판을 매번 말 속에 숨겨놨던 지난해와는 차이가 있다. 왕 부장은 당시 강 장관을 만나서는 “최대 위협은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일방주의이며 국제관계 규칙에 도전하는 패권주의”라거나 “대국이 소국을 괴롭히는 것,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12.4) 등 언급으로 미국을 에둘러 비판했다. 우호 인사들을 초청한 행사에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두고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서 만든 것”(12.5)이라고 불만을 드러냈고, 문 대통령 접견에서도 “국제 정세는 일방주의와 강권정치의 위협을 받고 있다”(12.5)고 주장했다. 반면 이번에는 대미 관련 언급을 삼가는 모습이었다. 미국 신행정부가 대중 정책을 구체화하지 않은 점을 고려한 행보다.

왕이 외교부장이 26일 오후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 왼쪽부터 민주당 이재정·김한정 의원, 이 전 대표, 왕이 부장, 박정·김영호·김성환 의원. 연합뉴스

일각에서는 전날 미-중 경쟁의 구도 속에서 한국의 미국 편중을 막으려는 게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왕 부장이 “지금 이 세계에 미국만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한 발언을 두고 ‘미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거나 ‘미국의 대중 압박에 동참말라’는 의도가 담겼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날 왕 부장의 발언의 맥락을 보면 되레 애써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한-중 관계를 언급하기를 꺼리는 모양새로 이해하는 게 합리적이다. 왕 부장은 위 질문에 답하며 “190여개 국가가 있고 모두 독립 자주 국가다. 한국도 중국도 그렇다. 특히 한-중 양국은 이웃나라로서 빈번하게 왕래하고 친인척처럼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정부나 여당 인사에게 ‘미국 편을 들지 말라’는 메시지”와 “압력”을 미치려는 의도가 있느냐는 후속 질문에도 그는 “외교가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학자처럼 외교를 하면 ‘외교’가 안 될 것이다. 물론 학자들은 각종 가능성을 추측해도 좋다”고 답했다. 방한이 “미-중 경쟁과 관련된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계속 같은 질문을 하신다”며 “가장 우선적으로는 중-한 관계, 중-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 속에 뼈를 심어 날카롭게 구사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 왕 부장의 평소 언행과 비교하면 과잉 해석으로 보인다.

26일 낮 정부서울청사에서 강경화 외교장관과 회담을 마친 왕이 외교부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왕 부장이 이번 방한에서 미-중 대치를 부각하지 않았다고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은 또 있다. 그는 강 장관과 오찬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트럼프 때와는 다르리라는 희망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 전 대표 만찬 자리에서도 왕 부장은 김한정 의원이 최근 미국 워싱턴을 다녀왔다고 하니 관심을 보이며 “다자주의를 환영한다.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 불충돌 불대항이 중국의 정책”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이 일단은 미국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겠다는 메시지로 관측된다.

26일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스>의 사설을 보면 중국의 대미 탐색과 견제는 좀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 매체는 바이든 당선자가 24일(현지시각) 미국이 “세계를 이끌 준비가 됐다”고 한 말을 두고 “바이든 팀은 반드시 한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들은 “세계를 이끌어” 무엇을 하게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이어 미국이 “중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단결”하는 것은 “아메리카 퍼스트(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의 복제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사설은 “바이든 팀은 중-미 경쟁에서 얼마나 건설적인지에 따라 평가된다”며 “주요 미국 동맹국은 모두 중국과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중-미 관계가 더 이상 분열되지 않으면 자국의 이익을 수호할 여지가 생긴다.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한다고 해서 중국과의 협력을 끊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대다수의 국가는 세계가 새로운 냉전으로 빠져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노력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썼다.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오후 청와대에서 왕이 외교부장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을 의식한 듯 왕이 외교부장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출범하지도 않은 미국에 각을 세우는 대신 중국이 택한 것은 미국 동맹들과의 협력 강화로 보인다. 왕 부장도 방한 기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인 한국과 협력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중국 외교부는 양국 장관 간 회담에서 회담에서 “풍성한 성과를 거뒀다”며 양국이 △코로나19 방역 협력 △한-중관계 미래발전위 설립 △한-중 외교·안보 2+2 대화 및 해양 실무대화 △2012년, 2022년 한-중 문화교류의 해 개최 △일대일로 한국 쪽 발전전략 연계 △한-중 자유무역협정 2단계 협의 조속 개최 및 중-한 경제무역협력 연합계획(2021~2025년) 제정 △베이징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 지지 △한반도 평화유지 협력, 한반도 문제 정치적 해결 노결, 남북 대화협력 지지 △9차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 지지, 한-중-일 자유무역지대 협상 추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조속 발효·이행 등에 대한 공감대를 이뤘다고 밝혔다. <글로벌 타임스>는 27일 논평을 통해 “왕 부장의 방한은 미국의 압력에도 깊어진 한-중 관계를 반영한다”고 짚기도 했다.

26일 정부서울청사를 방문한 왕이 외교부장이 강경화 장관과 회담 전 팔꿈치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중국이 접근의 틀을 양자의 이익에 기반한 협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져가면서 한국 등 주변국이 미국으로 급속히 기울우는 것을 막고 중국과의 관계의 끈을 튼튼하게 하려는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사드 보복’과 같이 중국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압박하는 전략에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이희옥 성균중국연구소 소장도 왕 부장의 방한을 총평하며 “중국이 미-중 관계 속에서 한국을 중시하겠다는 중국의 전략적 의도가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한-중 간 전략적 관계를 강화해서 미-중의 파고 속에 한국이 지나치게 미국에 경도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라고 봤다. 미국의 동맹인 한국과 전략적 협력을 통해 어느 정도 중립화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고 중국이 민감한 사안에서까지 물러선 것은 아니다. 중국 외교부의 26일 발표를 보면 양국 외교장관 회담에서 왕 부장이 강 장관에게 “한국 쪽이 중-한 사이에 민감한 문제를 적절한 방식으로 처리함으로써 양국 간 상호 신뢰와 협력의 기초를 지켜나가기를 바란다”거나 “공동으로 평화·안전·개방·협력의 인터넷 공간을 구축”하자는 등 발언으로 미국이 배치한 한국의 사드 문제나 미국 정부가 주도해 화웨이 등 중국의 첨단기술과 기업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견제했다고 볼 수 있다. 사드 문제나 한한령에 대해서도 진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중 관계 속 한국 정부의 고민은 계속될 전망이다.

김지은 기자 mir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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