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세월에도 여전한 '편 가르기'.. 한 발 물러서 보면 다 알게 될 것을

이태훈 기자 2020. 11. 2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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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저물도록 너, 어디 있었니'.. 추한 정치 현실 풍자한 명품극
연극 ‘저물도록 너, 어디 있었니’(작 정복근, 연출 한태숙)의 무대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덩어리처럼 뭉쳐진 시위대가 이 말, 저 말 뒤섞여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구호를 외칠 땐 퍼런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경기도극단

“섬뜩한 건 기시감이야. 두 번 보는 영화 같아. 끝을 알 것 같아. 경계는 늘 움직이고, 어제까지의 관행을 오늘은 범죄라고 하지.”

곧 어떤 사건의 ‘꼬리’로 구속될 운명인 고위 공직자 ‘남편’(윤재웅)이 말했다. 그 말이 더 섬뜩하다. 창 밖 시위대의 외침 소리는 갈수록 격렬해지고, 시위하러 간 대학생 딸을 찾아 나선 ‘아내’(박현숙)는 낯선 여자 ‘하련’(손숙)과 마주친다. 어둑어둑 해 저무는 혼돈의 거리에 남편을 찾아 나선 ‘하련’이 낮게 혼잣말 한다. “저러다 다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한 발씩 물러서 보면 다 알게 될 것을.”

연극 ‘저물도록 너, 어디 있었니’(작 정복근, 연출 한태숙)의 무대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시위대가 덩어리처럼 뭉쳐져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구호를 외칠 땐 퍼런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인물들은 무대 위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떨며 천천히 걷는다.

“좌익, 우익…. 왜 자꾸 패를 가르는데? 그거 다 내 이익에 맞서는 놈 이참에 제거하자는 흉악한 의도라는 걸 알면서!” 관객은 이내 월북을 택했던 민족주의자 시인 ‘임화’(한범희)와 그 아내 ‘하련’(손숙)이 살았던 광복 후 혼란기가, ‘남편’과 ‘아내’가 살고 있는 현재와 중첩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70년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이념을 빙자한 편 가르기는 만연하고, “끝없는 숙청과 처단” “누구나 누군가의 몰락을 기다리는” 염량세태(炎涼世態) 역시 변한 게 없다.

광복 후 혼란기와 여전히 이념을 빙자한 편 가르기가 만연한 현재를 잇는 여인 ‘하련’ 역의 손숙. /경기도극단

요즘 보기 드문 깊이의 연극. 지난해 말 경기도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한태숙(70)이 코로나로 공연 취소를 거듭한 끝에 올해 처음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극작가 정복근(74), 배우 손숙(76)까지 공연의 기둥인 세 연극인의 연륜이 합계 220년, 무대 경력은 150년을 헤아린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하련’ 역의 손숙은 혼잣말을 할 때조차 진흙 위에 발자국을 새기듯 힘이 느껴진다. 무대 위에 우뚝 선 푯대같다. 한태숙 연출가는 “우리야말로 지금 믿었던 길잡이에게 속고, 그렇다고 다른 길잡이를 찾지도 못한 무참한 상태로 살고 있지 않나” 물으며 “추한 정치 현실을 접할 때마다 그딴 것은 밀어두고 싶어 세상 밖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모른다”고 했다. 경기아트센터에서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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