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가부장제와 '미세한 차별'

김선영 TV평론가 2020. 11. 2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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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드라마 <며느라기>.

웹툰계의 <82년생 김지영>이라 불린 수신지 작가의 작품 <며느라기>는 드라마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많은 기대를 모았다. 지난 21일, 카카오TV 오리지널 웹드라마로 드디어 첫선을 보인 <며느라기>는 공개 5일 만에 1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아직 첫 회이긴 하나 완성도 면에서도 호평할 만한 지점이 많다. 유명 원작과의 비교, 만화의 영상화, 회당 2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등 여러 부담스러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며느라기>는 원작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숏폼’이라는 형식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또 하나의 웹툰 영상화 성공 사례를 예감케 한다.

김선영 TV평론가

그동안 드라마에서 일명 ‘시월드’는 통속극의 주요 소재로 활용돼왔다. 이 같은 작품들은 시월드의 악행과 수난받는 며느리의 갈등 구도를 키우는 데만 초점을 맞추며 정작 주시청층인 중장년 기혼 여성들을 둘러싼 가부장제의 억압적 구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웹툰 <며느라기>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이처럼 극적으로 과장되고 단순화된 고부 갈등 구도를 내세우는 대신, 일상 속 미세한 차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해 가부장제의 모순을 꼬집는다는 데 있다. 작품은 이제 갓 결혼한 여성 민사린의 일상을 중심으로 한다. 사린의 남편 무구영과 시어머니 박기동은 기본적으로 예의 바르고 다정한, 통속극 속의 ‘막장 악역’과는 다른 인물들이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생신을 챙기기 위해 방문한 시가에서, 사린이 말없이 식사를 하는 동안 남편과 시가족이 그들만 아는 이야기를 나눌 때, 사린은 어쩔 수 없이 이방인임을 실감한다.

이렇듯 평범한 얼굴을 한 차별은 선명히 드러나지 않기에 외려 더한 답답증을 유발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이 ‘저 정도면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듣는 남편 옆에서 조용히 병들어갈 때, <며느라기>의 민사린 역시 진심 어린 애정과 별개로 가부장제의 불합리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남편과 시가족의 ‘선량한 차별’에 지쳐간다. 실제로 수신지 작가는 2018년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민사린의 시댁은 대한민국 평범치보다 상위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극단적인 상황을 다 배제한 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차별의 에피소드에 주력했다고 밝힌 바 있다.

드라마 <며느라기>는 웹툰의 이런 핵심 미덕을 그대로 가져온다. 작품은 갈등을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을 포착하는 데 주력한다. 부드러운 이미지의 배우 권율이 연기하는 남편 무구영은 원작보다 로맨틱한 모습으로 그의 무신경함을 가린다. 더 흥미로운 캐스팅은 시어머니 박기동 역을 맡은 배우 문희경이다. 그동안 통속극에서 강렬한 악역을 주로 연기했던 문희경은 이 작품에서 전에 없이 상냥한 얼굴을 유지하는데, 그 이미지의 격차야말로 선량한 차별의 근본적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며느라기>가 웹드라마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이 만약 지상파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매회 한 시간 분량의 서사를 만들어내려 인물들의 캐릭터와 갈등이 더 세게 묘사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회당 20분 정도의 숏폼은 극적인 갈등 없이도 민사린의 표정만으로 일상 속 미세한 차별이라는 주제의식을 극화할 수 있다. 가령 아들 무구영에게는 편히 쉬라고 말했던 시어머니가 퇴근 후 생신상까지 준비하느라 더 피곤한 사린을 늦게까지 붙들고 아들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때, 드라마는 저린 발을 주무르는 사린의 손과 지친 표정만으로도 ‘며느리’의 고충과 시월드의 모순을 잘 전달한다.

원작 <며느라기> 역시 기존의 장르물 위주 웹툰 시장에서 연재처를 찾지 못한 작가가 직접 SNS에 올린 게 흥행 신화의 시작이었음을 생각하면, 지상파 드라마의 흥행 공식과 다른 길을 택한 웹드라마의 전략은 참으로 적절했다. 그리하여 <며느라기>에 대한 호평과 대중적 호응은 양가적 감정을 이끌어낸다. 한편으론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가부장제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분노이고, 또 한편으론 미세하기에 한층 교묘한 차별을 인지하기 시작한 이들이 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안도감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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