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내가 죽던 날', 삶의 끝자락서 건네는 위로

서정원 2020. 11. 2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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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안고 사는 이들 연대 그려
김혜수·이정은·노정의 등 호연
영화 속 열연하는 현수(김혜수·오른쪽)와 순천댁(이정은). [사진 제공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러시아 시인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고 했지만 기실 쉽지 않은 경지다. 보통은 살면서 몇 번씩은 '세상은 왜 날 미워할까,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후회하며 자책하는 게 현실이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주인공들도 그랬다.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 받고 괴로워하며 세상을 등지려고까지 한다. 작품은 이들의 굴곡진 삶을 유장하고 묵직한 호흡으로 풀어낸다.

한때 잘나갔던 형사 '현수'(김혜수)는 남편의 불륜 이후 인생이 나락으로 치닫는다. 팔에 마비가 오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내 경력에 흠집이 갔고 직장 내 추문마저 돌며 경찰을 오랜 기간 떠나야 했다. 외딴 섬에서 발생한 자살사건 수사를 맡아 복직하려 한다. 사건의 당사자 고교생'세진'(노정의)의 삶에도 풍파가 많았다. 사랑하는 아빠는 밀수범이었고 경찰 추적이 시작되자 자취를 감췄다. 세진은 범죄 관련 장부를 발견하고 제출하며 수사에 협조하지만 자신은더 힘들어졌다. 증인 보호라는 명목 하에 한창 꽃다운 나이에 친구 하나 없는 섬에 내던져져 수인(囚人)처럼 살았다. 극단적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세진과 그가 남긴 흔적들을 따라가는 현수를 영화는 교차하며 보여준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던 세진에게서 현수는 다시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유일하게 세진과 왕래하는 이웃 '순천댁'(이정은)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돌본다. 섬 속에 갇혀 삶을 제대로 누리질 못하는 세진이, 전신이 마비돼 어디도 못 가고 자신의 수발을 받으며 살아가는 조카와 꼭 겹쳐 보였던 터다. 그 자신도 쓰라린 삶의 상처를 안고 있다. 남동생이 자살한 뒤 따라 죽으려 농약을 마셨지만 실패했고, 대신 목소리를 잃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쇳소리로 "아무도 안 구해줘. 네가 너를 구해야지. 인생이 네 생각보다 길어"라고세진을 위로할 때 객석은 눈물바다가 된다.

사건의 마지막까지 나아가는 과정은 자못 길게 느껴진다. 편린들을 보여주지만 쉽게 맞춰지지 않고 인물들 감정만이 진하게 묻어난다. 관객 시선을 계속 붙드는 건 애이불비(哀而不悲)를 밀도 높게 담아내는 배우들 연기다. 호연으로 정평이 난 김혜수·이정은은 물론이고 신예 노정의도 훌륭하다. 특히 배우가 실제의 자기를 담은 대목은 농도가 더욱 짙다. 현수가 친구에게 매일 꾸는 악몽을 얘기하는 장면 대사는 김혜수가 본인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썼다. 그는 "시나리오에서커다란 감정을 느꼈다"며 "이를 전달하기 위해 부차적인 모든 것들을 걷어냈다"고 했다. 12세 관람가.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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