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칼럼] 단말마는 계속된다

한겨레 2020. 11. 2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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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칼럼]
이시가키의 작품 〈K.K.K.〉가 그려진 지 90년 가까이 지난 올해, 백인 경찰관이 흑인 시민을 죽였고, 거기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백인지상주의자(트럼프 지지자)들이 매도하고 위협하는 풍경을 봤다. 케이케이케이는 살아 있다. 어떻게든 ‘허무’에 먹히지 않도록, 이런 환난 속에서 제정신과 존엄을 지키며 계속 싸우고 있는 선한 사람들, 예컨대 벨라루스와 홍콩, 타이의 사람들한테 배우며 스스로를 독려해 가야겠다.
이시가키 에이타로의 〈K.K.K.〉, 1936년, 캔버스에 유채, 76.8×91.6㎝, 와카야마현립 근대미술관 소장.

서경식 ㅣ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마침내 전세계에서 ‘디스토피아’ 도래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신형 코로나 재앙이 다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 일본에서도 도쿄 등 대도시권에서 연일 사상 최고의 감염자 수를 경신하고 있다. 11월21일에는 일본 전국의 하루 신규 감염자 수가 2500명을 넘었다. 이런 사태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얼마 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현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승리한 것은 오랜만에 듣는 낭보였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트럼프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선거 결과를 뒤엎으려 발버둥 치고 있다. 인정하기는커녕 얼마 남지 않은 임기 중에 외교와 내정에서 갖가지 일을 벌여 기정사실화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민의 반수 가까이가 그런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다. 이런 사태는 일종의 짓궂은 농담으로 입에 오르내리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농담이 아니라 현실이다.

11월19일, 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고원과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입식지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방문했다. 골란고원에서는 “이곳은 이스라엘 땅”이라는 말을 했고, 예루살렘 근교의 입식지에서는 “앞으로는 입식지 산출 수출품을 ‘이스라엘산’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서둘러 기정사실을 쌓아가려는 노골적인 시도 그 자체다.

3년 반 전인 2017년 4월6일 미군은 돌연 시리아 공습을 감행했다. 트럼프는 시리아 정부군 쪽의 화학무기에 희생됐다는 ‘예쁜 아기’ 영상을 보고 작심을 했다고 한다. 방미 중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찬을 하면서 공격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뒤 아프가니스탄에서 ‘핵무기 다음가는 파괴무기’라는 거대 폭탄(MOAB·모아브)을 사용했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1월12일 정권 간부들과의 회의에서 이란의 핵시설을 공격하는 선택지에 대해 물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 측근들이 “대규모 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며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한 방으로 형세를 역전시킬 군사 옵션을 계속 노릴 것이다. 중국과 군사 충돌도 벌어질 수 있다. 트럼프의 ‘발버둥’이나 ‘기분전환’에 휘말려 다수의 인명이 희생당할지도 모른다. 실로 디스토피아다.

지금(11월19일 오전)까지 미국에서 신형 코로나로 25만140명이 죽고 1149만2593명이 감염된 사실이 확인됐다. 사망자, 감염자 모두 세계 최다 기록이다.

트럼프 정권하에서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을까. 그가 죽이고 있는 것은 외국의 시민들만이 아니다. 자국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몇번이나 얘기했지만 다시 한번 말해 둔다. 인간은 전염병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런 트럼프를 어떻게든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시킨 것은 코로나 재앙에 대한 의도적인 무대책과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비롯한 인종차별·성차별에 대한 광범한 시민의 반발이었을 것이다. 올해 5월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에게 목이 눌려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항의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그것은 트럼프 재선 반대운동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림 하나를 소개한다. 일본계 미국인 화가 이시가키 에이타로의 작품 〈K.K.K.〉(케이케이케이, 1936)이다. 빌리 홀리데이가 부른 ‘이상한 열매’(스트레인지 프루트)라는 노래(1939)가 있다. “남부의 나무들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남부의 바람에 대롱대롱 흔들리는 검은 몸뚱이, 포플러 나무들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열매.” 1920년대에 미국 남부 일대에서 일상화된 흑인 차별과 폭행. 그 실행자가 백인지상주의 결사 큐클럭스클랜(케이케이케이)이었다.

와카야마현 출신의 이시가키는 돈벌이 이주민으로 미국에 간 아버지를 따라 소년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일하면서 영어를 배웠고, 성서나 사회주의 서적 등도 즐겨 읽었다. 당시의 배외적인 미국 사회 풍조 속에서 사회적 의식이 각성됐다. 1914년부터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그림을 배워 1916년 무렵부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이 그림은 화면에 폭행당하는 흑인만이 아니라 케이케이케이의 흰 두건을 벗겨내려는 또 한 사람의 흑인을 등장시켜 강력한 저항 장면도 그려냈다. 1929년 작가집단 ‘존 리드 그룹’이 결성됐고 화가 이시가키 에이타로와 노다 히데오 등 좌파계 일본인들도 참가했다. 아내 아야코와 함께 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첩보·선전기관인 전쟁정보국(OWI)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적성 외국인이 돼 행동을 제한당했고, 전후 냉전하에서는 매카시즘(빨갱이 사냥)의 표적이 됐다. 1951년 일본으로 귀국해 다시 미국으로 가지 않고 7년을 살다 죽었다.

앞서 얘기한 노다 히데오, 이 칼럼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 미야기 요토쿠,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이 된 구니요시 야스오 등 일본계 미국인 화가들 중에는 사회주의 또는 민주주의 입장에서 조국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민이나 돈벌이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심한 인종차별 속에서 하우스보이, 급사, 철도 공사장 인부, 계절농업노동자 등으로 일하는 한편 화가 수행을 계속하면서 ‘생활인’으로 당시의 사회 현실에 눈을 돌렸다.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한 화가들과는 다른 점이다. 1930년대의 ‘선한 미국’의 공기가 그들 ‘선한 일본인’을 키웠다. 미야기는 옥사했고,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밀명을 받아 지하활동을 했다는 노다는 일본에서 병사했다.

어느 식자는 “트럼프 정권은 헤게모니를 상실해가는 미국의 단말마(숨이 끊어질 때의 모진 고통) 같은 것이었다”(요시다 도루 홋카이도대학 교수, <마이니치신문> 11월18일)는 말을 했다. 그대로다. 미국은 분단되고 쇠퇴해가는 길로 착실히 굴러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단말마는 앞으로도 길게 이어지면서 많은 부패와 파괴를 거듭하며 심대한 손상을 인류사회에 끼칠 것이다. 이시가키의 작품 〈K.K.K.〉가 그려진 지 90년 가까이 지난 올해, 백인 경찰관이 흑인 시민을 죽였고, 거기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백인지상주의자(트럼프 지지자)들이 매도하고 위협하는 풍경을 봤다. 케이케이케이는 살아 있다. 미국이(그리고 세계가) 바뀌는 것이 얼마나 멀고 어려운 길인가 하는 생각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 어떻게든 ‘허무’에 먹히지 않도록, 이런 환난 속에서 제정신과 존엄을 지키며 계속 싸우고 있는 선한 사람들, 예컨대 벨라루스와 홍콩, 타이의 사람들한테 배우며 스스로를 독려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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