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체조 단련 '북 주민' 넘은 철책..나사가 풀려 있었다

박병수 2020. 11. 26. 15: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북한주민 월책 동부전선 가보니
압력전달 나사, 제기능 못한 듯
평소 '육안점검'만, 결함 발견못해
향후 감지기 전수조사·보완 방침
강원도 철원군 6사단 전방 철책에서 육군 장병들이 경계순찰근무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얼마 전 북한 주민이 월남할 당시 비무장지대(DMZ) 전방 철책의 ‘상단감지유발기’에 나사가 풀려 있어, 경보음이 울리지 않은 것으로 추정됐다. 군 당국은 상단감지유발기를 전수 조사하고 정비할 방침이다.

군 당국은 25일 동부전선 비무장지대 GOP(일반전초·지오피) 철책의 경계를 맡고 있는 부대로 기자단을 불러 현장을 공개했다. 지난 3일 북한 주민의 월책 당시 과학화경계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원인을 조사한 결과를 직접 설명하는 자리였다.

이날 기자단에 공개한 해발 975m 고지 현장은 한낮인데도 바람이 매섭게 불고 체감기온도 영하로 떨어져 초겨울의 추위가 완연했다. 군 당국의 설명을 듣는 내내 현지 부대에서 제공한 핫팩의 온기가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험준한 산과 계곡이 이어져, 이곳이 지형이 험한 동부전선임을 실감케 했다. 현지 부대장이 “날씨가 좋은 날엔 금강산도 보인다”며 손으로 북쪽 방향을 가리켰는데, 실제 어렴풋이 산 윤곽이 보였다.

동서로 이어진 산악지역은 3~4m 높이의 비무장지대(DMZ) 철책이 멀리 눈 닿는 곳까지 오르락 내리락 하며 가로질렀다. 군 장병의 안내로 철책을 따라 겨우 100m 정도 될까 말까한 오르막길을 걸었는데도, 비탈이 워낙 심해 숨이 금방 턱밑까지 찼다. 이런 곳을 매일 오가며 경계근무를 서는 장병들의 어려움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25일 언론 설명 행사가 진행된 동부전선에서 북쪽을 향해 찍은 사진. 보이지 않지만 바로 앞 계곡에 전방 철책이 설치돼 있다. 앞에 보이는 지역은 비무장지대(DMZ)와 북한 땅이며, 멀리 구름 아래 어렴풋한 윤곽이 금강산이라고 한다.

군 당국자는 멀리 뻗은 철책을 가리키며 “한반도를 약 300㎞에 걸쳐 가르는 철책은 이중으로 돼 있는데, 일부 3중으로 된 곳도 있다”고 설명했다. 남쪽 철책에는 촘촘히 격자 모양으로 짜인 ‘광망’(광케이블망)이 덧대어 설치돼 있었다. 군 당국자는 검은 빛깔을 띠는 광망을 가리키며 “이 광망에 일정 수준의 압력이 가해지면 경보가 울린다”고 말했다. 광망은 피복된 광섬유의 통로가 압력으로 좁아지면 신호 소실이 생기면서 경보음이 울리도록 설계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3일 월남한 북한 주민은 철책을 넘을 때 철주(기둥)를 타고 올라 압력을 분산시켜 광망이 울리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철주는 철책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일정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대로, 월남한 북한 주민이 몸무게 50㎏ 남짓한 왜소한 체격이고 체조를 배워 몸이 날렵한 사람이라면, 쉽게 철주를 타고 올라갈 수 있어 보였다.

군 당국자는 이날 철책에 설치된 광망을 직접 손으로 흔들어 보이며 “이런 정도로 흔들리는 것으로는 경보음이 울리지 않는다. 경보음은 광망이 절단되거나 절곡(구부러짐)되어야 울린다”고 말했다. 바람에 흔들려 경보음이 울리지 않도록 경보음이 작동하는 압력 수준을 조절해 놓았다는 것이다. 광망의 오작동을 막기 위한 조처가 몸이 가벼운 북한 주민이 철책을 넘을 때 허점으로 작용한 셈이다.

철책 윗부분은 윤형 철조망을 이고 있는 ‘와이(Y)자형 철책’이 설치돼 있는데, 여기에도 ‘상단감지브래킷’이라는 감지기가 설치돼 있었다. 이 브래킷도 누군가 월책을 시도하려고 밟으면, 경보음이 울리게 돼 있다. 군 당국자는 “이 브래킷은 적의 침투가 예상되는 지역에만 설치돼 있으며, 당시 월남한 북한 주민이 넘어온 곳에는 설치돼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 전선의 와이자형 철책에 상단감지브래킷을 모두 설치할 방침이다.

광망은 철책보다 1m 남짓 더 높은 곳까지 설치돼 있었다. 와이자형 철책의 끝부분에 1.2m 남짓한 지지대가 덧대어 있으며, 광망은 이곳 지지대에 얹혀 있었다. 또 그 끝부분에는 ‘상단감지유발기’라는 감지기도 달려 있었다. 이것도 누군가 밟거나 일정 수준의 하중이 가해지면 경보음이 울리게 돼 있다고 한다. 지난 3일 북한 주민은 이 상단감지유발기를 밟고 월척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시 경보음은 작동하지 않았다.

철책 귀순 사건 당시 상황 그래픽. 연합뉴스

군 당국자는 이에 대해 “그동안 전문업체와 합동으로 조사한 결과, 상단감지유발기 내부에 압력을 감지기에 전달해주는 나사가 풀려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나사가 느슨해져 흔들리는 바람에 하중을 감지기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철책에는 광망과 상단감지브래킷, 상단감지유발기 등이 설치돼 있었지만, 3일 북한 주민의 월책 당시 이들 3중의 경보음 체계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이들 철책에 설치된 이들 과학화경계시스템은 평소 육안 점검만 한다고 한다. 군 당국자는 “상단감지유발기는 내부를 뜯어볼 수 없도록 리벳팅돼 있는 데다가 높은 철책 위에 있어서 따로 정밀 점검을 하기 어렵다”며 “다만 상황실에서 점검해 광망에서 이상 파형이 확인되면 사단에 있는 점검팀에 연락하거나 외부업체에 의뢰한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앞으로 “상단감지유발기를 전수 조사하고 정비를 통해 정상기능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 문제가 된 상단감지유발기는 설치된 지 5년 남짓 됐다고 한다. 군 당국이 이 장비의 유효기간을 10년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애초 부품 불량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군 당국자는 “하자보수 기간 2년이 지났고 다른 곳의 장비도 조사한 결과 극히 일부에서만 이런 문제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부품 불량보다는 노후화 현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3일 북한 주민 1명이 동부전선 철책을 넘어 월남했다. 당시 군은 이 주민이 철책을 넘을 때 광망은 울리지 않았지만 열상감시카메라(TOD)로 관측한 뒤 즉각 출동해 철책에서 1.5㎞ 떨어진 민간인통제선 지역에서 신병을 확보했다. 이날 기자단과 동행한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당시 작전은 GOP 경계 작전 절차에 따라 귀순자를 식별하고 신병을 확보한 정당한 작전 수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언론들은 월책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다며 “경계 실패”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번 기자단 현장 설명 행사는 26일 합동참모본부(합참)의 국회 설명을 앞두고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번 행사는 지난 3일 북한 주민이 월책한 부대가 아니라 그 인근의 부대에서 실시됐다. 군 당국자는 “좀 더 동부전선의 현장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지역을 선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는 전날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되면서 “설명 행사를 연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제기됐으나, “국민의 의혹 해소 차원에서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군 수뇌부 의견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인제/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