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주 대 연개소문
[고구려사 명장면-111] 645년 당 태종과 당군이 안시성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한 후 고구려 국내 정세는 어떠하였을까? 무엇보다 안시성주를 비롯하여 건안성, 신성 등 요동 지역 최전선에서 당군의 공세를 물리치고 성을 지켜 낸 성주들의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진다. 또한 중앙에서 전쟁 전체를 지휘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연개소문이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무엇을 얻었을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안타깝게 전혀 자료가 없다. 그래도 궁금증은 어쩔 수 없으니, 다소 상상력을 발휘해 최대한 추론해보도록 하겠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은 중앙 정계의 기존 세력에 타격을 주어 정권을 차지했을 뿐이지, 정변 직후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반대파 세력들에게 지지를 얻지도 못하고 또 그들을 제압하지도 못했다. 반대파의 대표적인 사례가 안시성주였다.
심지어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안시성주와 충돌하였음을 당 태종이 익히 알 정도였으니,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 차이는 꽤나 분명했던 듯하다. 물론 당시에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주의 세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양자 사이에 타협이 이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645년 당 태종의 침공으로 요충지 요동성이 함락되면서 최전선 방어선이 흔들리고, 연개소문이 보낸 중앙 구원군마저 주필산 전투에서 괴멸하면서 고구려의 국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을 때 마지막 항전의 불씨를 살린 인물이 안시성주였다.
3개월간 벌어진 안시성 공방전은 안시성주와 안시성민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었겠지만 고립무원의 절박한 상황을 이겨낸 안시성은 당군의 퇴각 이후 요동 방어망에서 그 위상이 크게 높아졌으리라 짐작된다. 다시 말하자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 안시성주의 발언권이 적어도 요동 지역에서는 통했으리라고 본다.
본래 요동 방어망의 핵심은 요동성을 중심으로 북쪽의 신성, 남쪽의 건안성이 큰 성이었으며, 성주의 지위 역시 최고 지방관인 욕살급이었다. 그런데 그 핵심이 되는 요동성이 당군에게 함락되었고, 당군은 퇴각하면서 요동성과 개모성의 주민을 모두 사민해갔다. 그리고 요동성이 더 이상 방어 기능을 할 수 없도록 성벽도 철저하게 파괴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는 다시 요동성을 개축하고 주민을 이주시켜 요동 방어선의 핵심으로 삼았을까? 이 점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후 기록에서 요동성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당군의 공세는 여러 차례 신성에 집중되었고, 또는 안시성이 종종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요동성은 재건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요동성은 평지성으로서 재건해보아야 당군의 공세를 막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신성, 건안성, 안시성 모두 산성으로서 당군과 전투할 때 탁월한 방어력을 과시했음과 비교된다. 요동성이 재건되지 않았다면 결국 요동성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성은 안시성뿐이었다. 그렇다면 안시성이 요동 방어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45년 전쟁 후 절대적으로 높아진 셈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또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영역 각지에서 대당 항전이 벌어졌는데, 671년 당 고종의 명으로 한반도로 진군한 동주도 행군총관 고간(高侃)이 7월에 안시성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서' 등 문헌 자료에서 요동 지역 부흥 전쟁의 주체로 안시성을 유일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시기 부흥 전쟁 때에도 안시성이 요동 지역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두 사례만으로도 645년 전쟁 이후 안시성 위상이 매우 커졌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사실 645년 당 태종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에는 안시성 외에도 건안성, 신성 등을 지켜낸 성주들의 공이 제1순위라고 할 수 있다. 중앙에서 연개소문이 보낸 대군은 압록강 방어선을 지키는 데 주력하였고, 그중 고연수 등이 이끄는 6만~7만명 정도의 군대가 안시성을 구원하러 갔다가 이른바 주필산 전투에서 궤멸하였으니, 결국 중앙정부와 연개소문의 역할은 별로 없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중앙에서 적극적으로 요동 전선을 지휘하였다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요동성과 백암성을 구원하러 나타난 구원군이 별다른 전투도 없이 사라진 점을 보면 당시 요동 전선이 일정한 통솔력에 의해 움직이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요동으로 출정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사실인데, 연개소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수도 평양성을 떠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요동에 와봤자 각자 독자성을 갖고 있는 요동의 성주들을 통제할 자신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사실 이 시기 요동의 성주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아니라고 추정된다. 최근에 중국에서 발견되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명에서 최말기 요동 지역 성주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고흠덕(高欽德) 묘지명'과 '고원망(高遠望) 묘지명'이다. 이 두 사람은 부자 관계인데, 이들 묘지명에 기록된 이 가문 인물인 고원(高瑗)-고회(高懷)-고천(高千)-고흠덕(高欽德)은 4대에 걸쳐 건안주도독(建安州都督)을 세습 역임하였다고 한다.
고흠덕의 출생년이 677년이므로 증조부인 고원은 6세기 말~7세기 초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적어도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임이 분명하다. 조부인 고희도 고구려 멸망 전에 활동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원과 고희가 역임했다는 건안주도독은 실제로는 고구려 지방관인 건안성(建安城) 성주다. 즉 642년 당 태종이 침공하였을 때 당군의 공세를 막아낸 건안성 성주는 고원이나 고회일 가능성이 높다. 즉 고흠덕 가문은 7세기에 들어 최고위 욕살급인 건안성 성주로서 대를 이어 갔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당의 기미 체제에 의해 건안주도독 자리를 세습해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원 가문이 건안성주 자리를 세습하는 현상은 연개소문 가문이 막리지 지위를 세습해간 점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인다. 막리지 등 고위 중앙관직만이 아니라 최상위 지방관인 욕살(褥薩)이나 처려근지(處閭近支) 등 고위 지방관 역시 유력한 가문들이 역임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직위가 세습되어 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말기에 요동 지역의 욕살급·처려근지급 지방관들은 일종의 군벌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 양제의 침공이나 당 태종의 침공 때에 각지 성들이 방어시스템에서 유기적으로 연계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각 성이 스스로 방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독자적인 전투력을 보유한 처려근지급 이상인 주요 성들은 결국 자립적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645년 전쟁에서 당군에 함락된 개모성이 양곡 10만석, 요동성이 50만석을 비축한 점 등은 이들 주요 방어성들이 조세 수취 시스템까지 독자적으로 운영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추론해 본다면 645년 전쟁 이후 안시성주 등 요동 지역의 주요 성들을 장악하고 있는 군벌적 성격의 성주들을 중앙에서 연개소문이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당 태종을 물리치고 명성이 높아진 안시성주가 요동 지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연개소문은 중앙에서 자신만의 사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제 고구려의 방어전선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소리 지르며 나비처럼 나는 돌` 그리는 서양화가 김정권
- [오늘의 MBN] 동네 쓰레기가 저절로 모이는 집
- [오늘의 매일경제TV] `숙면의학 시대` 슬기로운 수면 생활은?
- [포토] 서울도서관 외벽에 설치된 긴급 멈춤 대형 현수막
- [포토] 2020코엑스 푸드위크
- 강경준, 상간남 피소…사랑꾼 이미지 타격 [MK픽] - 스타투데이
- AI가 실시간으로 가격도 바꾼다…아마존·우버 성공 뒤엔 ‘다이내믹 프라이싱’
- 서예지, 12월 29일 데뷔 11년 만에 첫 단독 팬미팅 개최 [공식] - MK스포츠
- 이찬원, 이태원 참사에 "노래 못해요" 했다가 봉변 당했다 - 스타투데이
- 양희은·양희경 자매, 오늘(4일) 모친상 - 스타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