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 삼성가의 시간

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2020. 11. 26.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문재인 정부 초기 ‘갓뚜기’라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다. 오뚜기 창업주의 사망으로 후계자가 상속세 1500억원을 성실납세했고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해 애칭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세아홀딩스라는 중견회사의 젊은 후계자도 “상속세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며 흔한 절세책도 거부하고 계열사 지분까지 팔아 1700억원의 상속세 를 다 냈다. 상위 1% 큰 부자나 내는 부의 무상이전에 대한 세금인데도 이것 때문에 기업 못한다는 경제단체와 언론엔 눈총받을 일이다.

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지난달 말 한국 최고의 갑부라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오랜 투병 끝에 유명을 달리했다. 상장주식만 해도 어림잡아 18조원, 상속세가 11조원에 달한다니, 급기야 많은 상속세에 삼성이 걱정된다면서 “삼성 상속세를 없애달라”는 국민청원도 올라왔다. 언론들도 기업의 영속성을 해치는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세율을 낮추라고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33년 전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사망했다. 당시 자산만 10조원 넘는 삼성그룹 회장이었지만 상속재산은 겨우 237억원에 불과했고 게다가 삼성그룹 주식은 단 1주도 없었다. 신고한 재산도 공익법인에 출연하는 방법으로 세금을 줄였고 국세청의 세무조사까지 마치고도 결국 181억원만 냈다.

한국 최대재벌이 그룹회사 주식 한 주 없이 상속과 경영권을 승계한 수수께끼 ‘매직’은 2007년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풀렸다. 삼성 법무팀장이던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로 삼성이 차명관리하던 재산이 공개됐다. 특검에서 밝힌 차명재산 리스트에는 전·현직 임직원 486명 명의의 차명계좌 1199개에 예금 약 3000억원, 채권 약 1400억원, 차명주식 약 4조1000억원 등이 총 4조5000억여원에 달했다.

삼성가는 침착했다. 신속히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창업주가 차명으로 상속한 것을 모두 실명전환하고 누락된 세금을 납부할 것이며 세금을 뺀 나머지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특검은 검증도, 다른 재산에 대한 조사도 덮었다. 하지만 3가지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실명전환 없이 4조원 넘게 인출했고, 상속세와 과징금도 한 푼 내지 않았으며, 사회환원 약속도 공염불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공권력이었다. 그토록 엄정하던 국세청은 시민단체의 투쟁과 내부고발이 있기 전까지 단 1주의 차명주식도, 단 1원의 변칙적 유용도 찾아내지 못했고 차명재산이 공개되었는데도 수수방관했다. ‘차명’도 비실명자산으로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까지 있었지만, 금융당국은 실명전환 없이 4조원 넘게 인출했어도 징수를 포기했다. 결국 수조원에 달하는 상속·증여세와 과징금·소득세 모두 고스란히 놓쳤다.

2020년 삼성가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6년 전 병석에 누웠을 때 이미 상속세 계산과 절세책 마련까지 끝냈을 삼성이다. 하지만 내년 4월엔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고 이 회장의 총재산을 밝혀야 하고 스타일 구긴 국세청은 상속세 조사를 통해 이번엔 세금을 제대로 거둬야 한다.

추정컨대 삼성가의 상속재산과 상속세 규모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자랑스러운 국민기업 삼성이 손실을 보거나 한국 경제에 직접 영향을 주진 않는다. 오히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지금, 지쳐가는 우리 국민과 중소기업들이 힘을 낼 재난지원금을 한번 제대로 쏠 귀한 재정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삼성가는 이제 국민들에게 12년 전 약속한 성실납세와 사회환원은 물론 미처 밝히지 못한 재산까지 빠짐없이 신고해 국세청의 수고를 없애주길 바란다. 자랑스러운 국민기업 삼성전자처럼, 삼성가가 발렌베리 가문이나 빌 게이츠, 워런 버핏처럼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지 못할 이유는 결코 없다. 이제 삼성가의 시간이다.

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 세무사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