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가르는 바람의 노래' 실험미술 선구자 이승택展

김슬기 2020. 11. 2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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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서 60년 회고전
대지미술 등 장르 넘나든 250점
2022년 구겐하임서도 전시
"내 나이 이제 구십 다돼
마지막 전시 기억해달라"
올해 다시 제작돼 전시마당에 설치된 `기와 입은 대지`(왼쪽)와 `성장(오지탑)`.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중정(中庭)에 고래의 등뼈 같은 거대한 기와지붕이 내려앉았다. 지붕 위에만 있던 기와가 땅으로 내려와 광활한 대지와 인간을 감싸는 형상을 한 '기와 입은 대지'는 이승택(88)의 대표작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열린 '세계현대미술제-세계야외조각초대전'에 처음 소개된 이 작품이 2020년 다시 제작됐다. 경주에서 50~300년된 기와가 올라왔고 장인들이 설치했다.

기와지붕 위로는 길게 어망을 늘어뜨린 '바람 소리'가 걸렸다. 그의 '바람' 연작은 천이나 종이를 나무나 줄에 묶어 공간 가운데 펄럭이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바람의 흐름을 시각화한 데 비해, '바람 소리'는 고기를 잡는 어망으로 바람의 '형상' 대신 바람의 '소리'를 낚는다. 어망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면서 나는 독특한 소리를 통해 관객은 바람을 청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작가의 고향인 함경남도 고원의 광활한 대지에서 부는 스산한 바람 소리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 것이다.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승택의 60여 년 작품 세계를 온전히 회고하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전을 이달 25일부터 내년 3월 28일까지 개최한다. '성장(오지탑)'(1964), '무제'(1968) 등 대표작 10여 점은 다시 제작해 설치했다. 작가는 1950년대 이후 현재까지 설치, 조각, 회화, 사진, 대지미술, 행위미술을 넘나들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전시명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은 모든 사물과 관념을 뒤집어 생각하고 미술이라고 정의된 고정관념에 도전해온 그의 예술세계를 함축한다. 24일 만난 작가는 "연암 박지원이 예술에서 비슷한 건 가짜라고 했다. 우리도 외국 사조에서 유행한 걸 흉내내곤 했는데, 나는 그 유행이 몇 년 못 가 쓰레기가 된다고 생각했다. 남이 하지 않는 나만의 개념적인 작업을 시작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전시의 출발점인 6전시실에서는 '재료의 실험' '줄-묶기와 해체' '형체 없는 작품' 등 조형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이승택은 1960년대부터 전통 옹기를 비롯해 비닐, 유리, 각목, 연탄재 등 일상 사물들로 '비조각' 실험에 나섰다. 1970년 전후에는 돌, 여체 토르소, 도자기, 책, 고서, 지폐 등을 노끈으로 묶는 '묶기' 연작도 선보였다. 그는 묶기를 처음 한 건 1958년 졸업작품부터였다고 털어놨다. 여체 토르소를 묶은 작품은 "1980년대 국전에서 전시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낙선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작가는 1980년 5월 '공간'지에 쓴 '내 비조각의 근원'이란 글에서 "인간의 감각과 논리. 이러한 것의 존재론적인 물음을 모두 묶어 버린다면 어찌될 것인지. 그것은 오히려 생명이 넘치는 싱싱한 것이 되리라"고 설명했다. 이승택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사회, 역사, 문화, 환경, 종교와 성, 무속과 같은 삶의 영역으로 관심의 지평을 확장하면서 퍼포먼스, 대형 설치, 사진 등으로 작업 영역을 넓혀나갔다. 7전시실과 미디어랩에서는 '삶·사회·역사' '행위·과정·회화' '무속과 비조각의 만남' 등을 주제로 전시가 이어진다. 복도 공간에서는 '모래 위에 파도 그림'(1987), '예술가의 별장'(1987~1988)과 같이 사진과 회화가 결합된 작품도 걸렸다. 이번에 선보인 그의 대표작은 2022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22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아방가르드:1960~19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전을 공동기획한다. 이건용, 이강소, 김구림, 성능경 등과 함께 걸릴 예정이다.

미술관마당과 종친부마당에는 1970년 홍익대 빌딩 사이에 100여 m 길이 푸른색 천을 매달아 바람에 휘날리게 한 기념비적 작품 '바람'을 포함한 1970~1980년대 '바람' 연작 2점이 재현됐다. 천의 흔들림을 통해 바람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시적인 작품. 설명을 이어가던 노장은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이 바람 작품은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거다. 내 나이가 구십이 돼서 몇 년 못산다. 마지막 전시를 여러분이 보고 있는 거다. 영광이다. 이승택의 마지막 전시를 기억해달라."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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