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요금보다 싼 전기료가 기후변화 부른다
"에너지 전환 위해 개편 필수" 지적 많아
계속 미루다간 '탄소 중립' 진정성도 의심
전기요금체계 개편을 추진하는 한국전력이 개편을 완료하기로 공표한 시점이 임박했는데도 개편안 조차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말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2050 탄소 중립’ 선언으로 개편 작업이 가속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력산업계 기대가 빗나가는 형국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원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지금의 경직된 전기요금체계를 ‘탈탄소’를 위한 에너지 전환의 주요 걸림돌로 지목해 왔다.
‘탄소중립’ 진정성 시험할 전기요금 개편
한전은 지난해 7월 공시에서 전기요금체계 개편에 대한 정부 인가를 올해 6월말까지 받겠다고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못했다. 대신 정부 인가 시점을 ‘하반기 중 가능한 빠른 시일 내’로 수정 공시했다. 하지만 25일 열린 11월 정기 이사회에도 개편안이 상정되지 못하면서 한전이 투자자들에게 한 약속을 또다시 번복해야 할 지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전기요금 개편은 한전이 이사회에서 의결한 개편안을 정부에 제출한 뒤, 산업통상자원부가 전기요금 및 소비자보호 전문위원회 심의, 기획재정부 협의, 전기위원회 심의 등 여러 절차를 거쳐 인가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전기요금 개편 작업이 이처럼 지연되는 것은 최종 인가권을 가진 정부의 소극적 태도 때문이라는 것이 전력업계 내부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한전의 개편안은 이미 준비돼 있지만, 정부가 코로나19 유행과 탈원전 공방 등으로 뒤숭숭한 상황을 고려해 결심을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전기요금 체계 개편은 정부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한전이 공시를 통해 밝힌 개편 방향은 △필수사용량 공제제도의 폐지나 보완 △주택용 계절별·시간별 요금제 도입 △‘이용자 부담 원칙’ 확립을 통한 원가 이하 요금체계의 현실화 △연료비 연동제 등이다. 필수사용량 공제제도의 폐지·보완, 원가 이하 요금체계의 현실화 등은 많든적든 전기요금이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요금을 연료비에 연동시키는 것도 유가가 낮은 당장엔 요금 인하 효과를 내겠지만 유가가 오를 때의 요금 인상을 예약하는 셈이다.
결국 한전의 개편안은 공개되는 순간 탈원전에 따른 요금 인상 계획으로 규정한 보수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은 23일 국가기후환경회의가 환경비용 등을 반영해 전기요금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국민제안을 발표했을 때 이미 벌어졌다. 하지만 정부가 ‘탄소 중립’까지 선언한 뒤에도 전기요금체계 개편에 소극적이라면 선언의 진전성은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기후위기 불러오는 전기요금제
많은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현행 전기요금체계의 문제점은 원가 변화와 환경 비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용자들 사이의 불합리한 교차 보조를 낳는 복잡한 용도별 요금제와 각종 특례요금제에 대한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전기의 원가를 좌우하는 발전 연료비는 계속 변동한다. 국제 유가는 두바이유 기준으로 지난 10년 간 배럴당 최고 124.22달러와 최저 13.52달러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 하지만 전기요금은 2013년 11월 이후 지금까지 사실상 동결돼 있다. 주택용 요금에 대한 누진제 구간과 규모가 두 차례 조정된 것이 전부다.
그러다보니 한전의 경영 실적은 연료비 등락과 정반대로 출렁였다. 유가가 낮을 땐 요금이 원가를 웃돌아 흑자를 냈고, 유가가 높을 땐 그 반대였다. 지난 10년 동안 원가에 적정 투자보수를 더한 총괄원가 회수율이 100%를 넘긴 것은 저유가 시기인 2014~2017년 뿐이다. 이것은 한전의 경영 뿐 아니라 에너지 소비 구조까지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연제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전기요금은 소비자에게 적절한 가격신호를 보내 합리적 소비를 유도해야 하는데, 원가가 제대로 반영될 수 없는 지금의 요금체계에서는 이 기능이 상실돼 에너지 소비 구조 왜곡과 자원 배분의 비효율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싼 농사용 요금 탓에 전기가 기업농의 수입 농산물 건조 가공의 열원으로까지 활용돼 에너지 낭비를 초래하는 것이 그런 예다.
한국의 주택용 전기요금 수준은 2018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 터키, 아이슬란드에 이어 네 번째로 낮다. 2인 이상 도시근로자 가구의 월 전기요금이 2016년 기준 4만6543원으로 통신비 15만522원의 3분의1도 안 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2014년 이후 지난해까지 소비자물가지수가 5.6% 상승하면서 실질 전기요금은 14%나 하락했다. 실질요금 하락으로 소비자가 이익을 얻은 것으로 보이지만, 안 써도 될 에너지를 더 사용하면서 온실가스와 미세먼지를 더 배출하게 하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경직된 전기요금체계가 기후환경 위기까지 부르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연료비 연동제·환경비용 반영 이뤄져야”
전력산업계와 관련 전문가들이 전기요금체계 개편안에 꼭 포함돼야 한다고 꼽는 것은 연료비 연동제다. 발전용 연료비 변동이 요금에 제때 반영되지 않고는 안정적인 생산은 물론 합리적 소비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환경 오염과 같은 외부 비용을 제대로 반영하거나 최소한 소비자들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도 큰 이견이 없다. 이런 전기요금제 개편 방향은 지난해 정부가 확정한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에도 담겨 있고, 국가기후환경회의가 지난해 9월에 이미 발표한 ‘국민정책제안’에도 포함됐다.
연료비 연동제는 국외에서는 널리 시행되는 제도다. 국내에서도 이미 2011년 7월 시행을 목표로 전기공급 약관까지 개정한 바 있다. 하지만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우려 때문에 유보됐다가 2014년 5월 폐지됐다. 하지만 지금은 저유가가 이어지고 있어 연동제가 도입되면 전기요금은 내려가게 된다. 유가가 오르기 전인 지금이 연동제 도입의 적기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전기요금에 환경비용을 반영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7일 제1회 푸른 하늘의 날 기념사에서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겠다. 기후환경 비용을 반영하는 전력공급체계를 마련하고, 화석연료 기반 전력체계를 장기적으로 재생에너지 기반으로 바꾸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전은 이번 개편안에 일단 전기 생산·공급에 들어간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 비용과 재생에너지 공급 의무 이행 비용을 요금 고지서에 분리해 표시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소비자들에게 기후환경 비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전기를 절약하고 에너지 전환에 공감하도록 이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에너지 전환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전기요금 개편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박광수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공급 구조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기요금체계 개편을 통해 전체적인 에너지 소비 수준도 합리적 수준으로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행 전기요금 체계의 또다른 대표적 문제점은 ‘비용 유발자가 비용 부담자’라는 공정성 원칙을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주택·산업·일반 등 7가지로 구분된 용도별 요금제와 다양한 특례할인제가 소비자들 사이의 불합리한 교차 보조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용과 같이 단가가 높은 요금으로 전기를 쓴 소비자들은 단가가 낮은 주택용이나 산업용, 대규모 기업농 소비자들을 지원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용도별 요금제를 원가에 기반을 둔 전압별 요금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성수 한국산업기술대 에너지전기공학과 교수는 “전기요금은 인체에서 혈액과 같은데, 지금의 요금제는 이 구실을 못해 에너지 산업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 2050년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기요금제를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드는 비용까지 반영되게 합리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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