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정지의 힘

2020. 11. 2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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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좀 아팠다.

내 몸의 한 구석이 그만 나이를 알아챘다.

나는 스스로 부작위에 의한 직무유기죄의 내부고발자였던 것이다.

내가 상실한 건 정지의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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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고한 정지의 순간. 왕태석 선임기자

요즘 좀 아팠다. 내 몸의 한 구석이 그만 나이를 알아챘다. 병원에 다녔다. 그 사이 사회적 거리 두기의 간격도 넓어졌다. 안팎으로 몸과 맘을 누일 처소가 없다. 그런데 이 유배의 세상 속에서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초조와 강박은 본능처럼 일어선다.

한 편의 시가 내게로 걸어왔다. 페친의 포스팅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냥 지나칠 법도 했건만, 그 제목이 화살처럼 눈에 꽂혔다. 일곱 줄짜리 시에서 딱 네 줄째 읽어 가는 순간, 난 깨달음이 왔음을 깨달았다. 시는 유폐의 철문을 도끼로 사정없이 깨버렸다. 문이 열렸다. 누추한 마음, 핍진한 사유, 두려운 미래가 해방되는 걸 느꼈다. 인생에는 가끔 이렇게 각성의 순간이 찾아온다.

백무산 시인이 올 3월에 낸 열 번째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거기에 실린 시, 제목은 '정지의 힘'이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줄 알았다. 연필을 깎든, 온라인백과사전을 뒤적이든, 아령을 들든 뭐라도 해야만 삶이 유의미한 줄 알았다. 성취는 간절함의 보상인 줄만 알았다.

이제껏 부작위(不作爲) 혐의에 시달리며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게을리해서 무언가가 잘못돼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늘 기웃거리고 두리번거리고 뒤돌아보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에 대한 강박이었다. 나는 스스로 부작위에 의한 직무유기죄의 내부고발자였던 것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정지하지 않았으므로 질주하는 이유도 몰랐다. 내가 상실한 건 정지의 감각이었다. 이 세상 모든 탈것의 역사는 브레이크의 역사라는 걸 몰랐다.

미미한 겨자씨 하나도 기실 정지의 힘으로 피어난다는 것, 하지 않을 자유가 하게 하는 힘이요, 되지 않을 자유가 되게 하는 힘이라는 것. 이 시는 선문답이자 아포리즘이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쓰신 스님, 막상 당신은 멈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내려놓거나 함부로 버리지는 않겠다. 어차피 무소유는 가진 뒤의 자유요, 소유가 있은 뒤 조합된 낱말이다(백무산, '무무소유'). 삶은 롤러코스터처럼 엎어지고 자빠져도 매순간 그 궤적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12월로 접어드는 시간. 지금 나를 에워싸고 있는 건 단절, 고독, 초조, 불안이다. 시의 힘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박노해, '길이 끝나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희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직하게 절망을 견디는 일뿐이다.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김수영, '절망'). 난 어두운 터널 앞에 담담히 그러나 기품 있게 정지해 있겠다.

우는 소리는 내지 않겠다.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당신에게 토로하지 않겠다.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겠다. 우리 강가에서는 눈도 마주치지 말자(황인숙, '강').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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