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에 날아온 새들, 점과 획이 되다

노형석 2020. 11. 2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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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으로 날아온 새들은 점과 획이 되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흑백 스트레이트 풍경 사진만 고집해왔던 작가의 정적인 화면에 처음 동적인 피사체인 새가 조화롭게 들어왔고, 과거의 구작과 근작이 새를 매개로 융합하면서 작업 반경은 더욱 넓어지게 됐다.

전시를 열 즈음 '새' 연작 50여점을 담은 사진집도 프랑스 출판사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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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민병헌의 근작전 '새']
민병헌 작가의 신작 <새 57>(2019). 흐린 하늘을 뒤덮으며 활공하는 새떼의 모습을 추상화나 수묵화의 필획처럼 담아냈다.

사진 속으로 날아온 새들은 점과 획이 되었다.

날갯짓하는 하늘과 헤엄치는 호수를 화폭 삼아 그 위에 찍고 그은 붓질의 흔적처럼 새가 나타난다. 뚫어지게 살펴봐야 사진 속 점과 획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물길을 박차고 비상하는 생명체의 약동임을 알게 된다. 어떻게 날짐승을, 자연스러운 동세를 머금은 점과 좌표로 화면에 뽑아낼 수 있을까.

중견 사진작가 민병헌(65)씨가 근작 ‘새’ 연작을 통해 한껏 농익은 촬영과 인화의 내공을 과시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나우에서 이달 초부터 선보인 개인전 ‘새’는 ‘스트레이트 사진은 딱 부러진 재현’이란 세간의 상식을 뒤집는다. 지난해 작업한 ‘새’ 연작 50여점 가운데 20여점을 먼저 내보였다.

민병헌 작가가 찍은 신작 <새 135>(2019).

새 연작 20여점은 여러 겹의 농도로 다듬어진 회색빛과 검은빛의 화면을 바탕으로 날거나 헤엄치며 잔상을 남기는 이 땅의 새를 담는다. 눈 쌓인 모래톱이 보이는 겨울 강에 점점이 떠 있거나 훌렁거리는 능수버들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새들, 제주 산방산 아래 해변 상공을 휙 지나가는 갈매기, 햇살 비치는 물결을 뒤로하고 물보라 일으키며 날아오르는 오리떼의 모습. 모두 ‘새’란 제목 뒤에 몇번째 에디션인지 뜻하는 숫자만 붙었다. 찍은 장소, 날짜는 없지만 볼거리는 차고 넘친다. “내가 생겨먹은 대로 찍었다”는 작가의 농처럼 작품 하나하나의 세부와 색감이 모두 다르다. 날짐승의 몸이 자연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약동감에 보는 이나 찍은 이가 투영한 감정이 포개져 서서히 고양감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특장인 화면의 질감과 톤이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어느 작업보다도 인화와 현상에 부심한 흔적이 여실하다.

전북 군산시 월명동 작업실에서 신작 <새> 연작의 일부를 놓고 이야기하는 민병헌 작가.

지난해 사진을 정리하다 20여년 전부터 작품 속에 새가 피사체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뒤 피사체로 주목하고 뷰파인더에 담게 됐단다. 그러니까 과거부터 은연중 지속한 소재인 새를 별다른 생각 없이 담았다가 이런 사실을 알고 과거 필름을 찾아 재현상한 구작들이, 지난해부터 의도적으로 새를 특정해 포착한 근작들과 함께 섞인 셈이다. 작가는 새 연작에 대해 이전 작업과 확연히 구분되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 누드 외에 움직이는 동물로는 첫 작업입니다. <안개> <설원> 같은 과거 제 연작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보듯 전국 각지의 새들이 렌즈에 들어오길 기다렸지요. 전북 군산에서 홀로 작업하는 나 자신의 심사가 투영되더라고요. 쓸쓸함이나 외로움 같은…. 조선시대 문인의 성정을 담은 화조화 같은 느낌이라고도 하는데, 홀로 나는 새를 담을 땐 정말 그랬어요.”

현상·인화 측면에서 수십년 전 작업과 근작을 묶는 것은 모험이자 고행이다. 시점, 시각, 촬영 상황이 확연히 다르다. 화면의 농도와 감도를 균일하게 맞추는 것부터가 매우 까다롭다. 현상액 냄새가 진동하는 캄캄한 인화실에서 침침한 눈을 비비며 노광을 가려 밝게 하는 ‘닷징’과 노광을 더 주어 화면을 어둡게 하는 ‘버닝’을 강도 높게 되풀이하며 태어난 연작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민병헌 작가의 신작 <새 73>(2019).

아날로그 방식으로 흑백 스트레이트 풍경 사진만 고집해왔던 작가의 정적인 화면에 처음 동적인 피사체인 새가 조화롭게 들어왔고, 과거의 구작과 근작이 새를 매개로 융합하면서 작업 반경은 더욱 넓어지게 됐다. 전시를 열 즈음 ‘새’ 연작 50여점을 담은 사진집도 프랑스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러나 민 작가는 전시에 대한 반응에 그다지 마음 쓰는 기색이 아니다. 올해 초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시작한 장흥, 고흥 등 남도 풍경 기행 구상에 푹 빠져 있다. 그는 개구쟁이처럼 웃으면서 내년엔 ‘새’ 연작 전체를 미술관에 풀어놓을 참이니 기대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12월2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갤러리 나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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