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운스토리] 적벽추풍 즐기는 '호남의 금강산'

글·사진 박정원 선임기자 2020. 11. 2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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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부터 대둔산 기록 남아.. 한듬산이 원래 지명 주장은 근거 없어
대둔산 케이블카와 명물 구름다리, 삼선계단, 정상 마천루가 보인다. 사진 C영상미디어
산야로 떠돌면서 병들어 혼자 읊조리다 原濕風埃病自吟
푸르른 대둔산 들어서니 번뇌가 모두 싹 가시네 大芚晴色爽煩襟
청명한 이 시대에 매륜 할 일 있으리요 明時詎有埋輪事
질어(충신)의 마음 간직한 채 험한 고개 넘노매라 危坂聊憑叱馭心
만추에도 따뜻한 땅 장기가 아직 배어 있고 地暖窮秋留薄瘴
한낮에 산굽이 돌아서니 그늘이 겹으로 깔렸어라 山回亭午匝層陰
앞으로 두루 편력할 청절한 호남 땅 湖南淸絶行將遍
가는 곳마다 임금 은혜 분수에 넘치누나 隨處君恩分外深
<조선지지자료>에 대둔산이 산곡명으로 그대로 나타난다. / 16세기 후반 제작된 <동람도>에 있는 대둔산(원 안).
조선 중기 문신이면서 사대가로 꼽는 장유張維(1587~1638)의 <계곡집谿谷集>에 나오는 칠언율시 ‘고산도중高山途中’이다. 늦가을 푸르른 대둔산으로 들어서니 번뇌가 싹 가신단다. 옛 시에서 보듯 대둔산은 예로부터 늦가을에 특히 많이 찾은 산으로 보인다.
늦가을에 찾는 바위산은 한마디로 ‘적벽赤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적벽을 물들이는 단풍은 가히 가관이다. 이른바 예로부터 적벽추풍赤壁秋楓이라 했다. 전북과 충남에 걸쳐 있는 도립공원 대둔산大屯山(877.7m)은 호남의 금강산 혹은 삼남의 금강산으로 불릴 만큼 바위산의 위용을 자랑한다. 적벽추풍뿐만 아니라 바위산의 특이한 기암괴석과 독특한 형세는 영락없이 만물상을 연상케 한다. 금강산의 만물상은 이미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갈 수 없는 처지이고, 남한에는 합천 가야산의 만물상이 그나마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아기자기한 반면 대둔산은 조금 더 남성적 웅장미를 느끼게 한다.
대둔산 삼선계단은 마치 마천루 같이 하늘을 찌를 듯 거의 수직에 가깝게 오른다.
고려 중기 문신이자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이규보(1168~1241)도 대둔산을 가리켜 ‘위봉절령벽립만인危峯絶嶺壁立萬仞’이라는 글을 남겼다. 높은 봉우리 우뚝한 재가 만 길이나 벽처럼 서 있고, 길이 매우 좁아서 말을 내려서야 다닐 수 있다는 의미다. 흔히 벽립만인이나 만인벽립은 중국의 도교 성지 같은 아슬아슬한 절벽을 가리켜 표현한 말이지만 한국의 산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건 대둔산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대둔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 주는 현대적인 근거도 있다. 대둔산은 충남 논산시와 금산시, 전북 완주군의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도립공원이다. 그런데 3개 시군에서 공통적으로 8경 중 으뜸수준으로 지정하고 있다. 논산 8경 중 3경, 금산 8경 중 2경, 완주 8경 중 1경이다. 충남과 전북에서 각각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산이기도 하다.

정상 부근에 길이 81m, 너비 1m의 구름다리는 대둔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금강구름다리를 건너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수직에 가까운 마천루 같은 다리를 오른다.

이게 무서운 등산객들은 걸어서 올라가는 우회 등산로도 있다. 금강다리를 건너면 약수정이 나오고 여기서 마천루 같은 삼선계단을 타고 정상에 올라간다. 금강구름다리와 마천루 같은 삼선계단은 일방통행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이용한다. 적벽추풍을 만끽하는 11월 전후에는 사람들로 넘쳐나 자칫 위험할 수 있다. 정상에도 이 시기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대둔산은 이같이 봉우리마다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 감탄에 빠지게 해 가파른 등산길을 지친 줄 모르게 오르게 한다. 대둔산의 장관은 최고봉 마천대를 비롯 제2봉 낙조대와 태고사, 그리고 왕관바위, 금강폭포, 동심바위, 금강계곡, 삼선약수터, 옥계동계곡 등을 거치며 기기묘묘한 바위형상은 마치 신이 빚은 듯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대둔산 등산객들이 금강구름다리를 건너 정상을 향하고 있다.
충남·전북에서 각각 도립공원으로 지정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대둔산은 명소 또한 3개 시군에 고루 분산되어 있다. 완주의 명소는 대둔산 케이블카와 정상 마천대, 논산의 명소는 수락계곡, 금산의 명소는 천년고찰 태고사와 제2봉 낙조대, 생애대 등이다. 어느 코스로 가든지 4시간 내외면 원점회귀 할 수 있다.
흔히 대둔산은 ‘큰 바윗덩이의 산’이란 뜻의 한듬산이라 불렀으며 일제 때 한자화하면서 한은 큰 대大자로, 듬은 이두식으로 둔屯으로 고쳐 대둔산이라 명명했다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완전 낭설이다. 누가 지었는지 그럴 듯하게 지어낸 주장이다. 요즘 말로 완전 가짜뉴스.
대둔산은 고려 중기 문신 이규보가 남긴 글에서 알 수 있듯 이미 오래 전부터 독특한 바위산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조선시대 들어서도 숱한 선비들이 대둔산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고려 중기부터 지명이 등장한 사실을 보면 그 이전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고려사>나 <삼국사기>에서는 대둔산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대둔산 정상 마천대에는 개척탑이 우뚝 솟아 있다. 만추의 계절에 많은 등산객이 찾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글자에서 알 수 있듯 대둔산은 큰 언덕의 산이다. 그런데 둔을 언덕이나 진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견고하면서 험난한 지형의 뜻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산의 형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둔산으로 명명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 관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진산편에 ‘(대둔산은) 군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고산현편에도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현梨峴은 군 서쪽 10리, 대둔산 남쪽에 있다’와 ‘대둔사는 대둔산에 있다’는 내용이 있다. 대둔산이란 제목으로 시를 읊은 기록도 여럿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조박은 ‘태실봉고변군명胎室峯高變郡名’이라 하여 ‘(구름사다리 다한 곳에 촌락이 열렸고), 태실봉이 높으니 군명을 고쳤네’라고 노래했다. 비슷한 시기에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정이오도 ‘점점봉만수點點峯巒秀’라 하여 ‘점점한 봉우리는 빼어나고 영령한 간수는 맑다’고 대둔산의 빼어난 바위봉우리들을 보고 감탄했다.
같은 책 고산현편에서도 대둔산이 소개된다. 지금 전북과 충남의 경계에 있듯이 당시에도 고산현과 진산군에 속했다. ‘대둔산은 현의 북쪽 45리에 있다.’ 이어서 도솔산兜率山은 현의 북쪽 35리에 있다‘고 나온다. 대둔산이 도솔산보다 북쪽으로 10리 더 떨어져 위치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는 수백 년 뒤에 제작된 <산경표>에는 호남정맥의 산들을 마이산~주줄산~왕사봉~탄현~이현으로 연결시켜 나열하면서 뒤이어 대둔산이 등장한다. 대둔산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서북쪽으로 도솔산이 가지를 뻗어나온다’고 쓰여 있다.
용이 빠져나와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대둔산 용문굴.
예로부터 풍광 뛰어나 시로 남겨
이를 <대동여지도>와 비교해서 보면, 대둔산 아래 있는 도솔산과 대둔산 바로 위 도솔산으로 나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 도솔산은 대둔산 아래 있는 산을 지칭하는 것이고, <산경표> 대둔산 옆에 설명이 덧붙은 도솔산은 대둔산 바로 위에 있는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산의 불교지명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다시 고산현편에 ‘탄현은 현의 동쪽 50리에 있는데, 진산군 이현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경표>에 나온 호남정맥 아래 능선줄기가 바로 이현과 탄현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충청도 진잠현편에서는 대둔산에서 발원한 증산천을 소개하고 있다. 증산천은 차탄車灘으로 들어간다. 이 하천은 흘러서 대전의 갑천으로 합류한다. 이러한 명칭들은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옛 문헌뿐만 아니라 고지도에서도 대둔산이란 지명은 그대로 나타난다. 16세기 후반 제작된 <동람도> 전라도편에 대둔산 지명이 뚜렷이 나타난다. 17세기로 추정되는 전국을 도별로, 그리고 군현별로 첩으로 제작한 <동여비고>에서도 대둔산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후 18세기 중엽 제작된 목판본 <지도>에도, 19세기 후반 제작된 <해동좌람> 전라도편에서도 고산현에 대둔산만 나타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한듬산이라는 이름을 일제가 대둔산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옛 문헌이나 고지도를 통해 전혀 근거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동여비고>에 대둔산이 뚜렷이 표시돼 있다.
개인문집에서도 대둔산은 자주 등장한다. 1770년대 실학자 이긍익이 조선시대 정치·사회·문화를 기사본말체로 서술한 역사서 <연려실기술>16권 지리권고에서 한반도의 지리 전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중 대둔산 관련 부분은 ‘마이산의 또 한 줄기는 웅치로부터 북으로 뻗쳐 한 줄기는 석산이 되며 거꾸로 내려가다가 구봉산·주취산·운제산·탄현·이치가 되며, 대둔산이 되어 충청도 지경에 들어가서 금수錦水를 등지고 돌아 계룡산이 된다. 계룡산 한 줄기가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크게 끊어져서 판치板峙가 되고, 불쑥 솟아서 북치北峙가 되며, 공주부 월성산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경표>의 호남정맥에 대한 설명과 맥을 같이 한다.
조선 초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점필재집>에서 ‘고산탄현유회성충高山炭峴有懷成忠’이란 시를 남겼다. 고산의 탄현에서 백제의 성충을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대둔산 아래 세 겹의 고개가 있는데 大屯山下三重嶺
탄현이 중간에 서려 있어 적의 요충 이뤘으나 炭峴中蟠作敵衝
신라의 오만 군대가 용이하게 통과하니 五萬東兵容易過
부여의 왕업이 이내 헛일이 되어 버렸네 扶餘王業旋成空’
조선 중기 문신이자 문장가 유몽인의 <어우집>에서도 ‘(전략) 연산(지금의 논산)이라는 고을은 호남과 호서의 경계에 있으면서 동으로 속리산과 이웃하고, 북으로 계룡산과 경계를 이루며, 멀리는 지리산과 이어지고, 가까이는 대둔산과 접해 있다. 이들은 모두 명산이자 거악巨嶽으로 숲이 울창하고 골짜기가 깊으니, 범이 여기에 소굴을 만들어서 새끼를 낳고 기르기에 실로 적당한 곳이다. (후략)’라고 소개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대둔산과 그 위에 도솔산이 나타나 있다.
고려 말 목은 이색은 독서처로 삼은 듯
더욱이 고려 말 위대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삼은三隱 으로 더욱 익숙한 목은 이색의 <목은집>도 ‘목은의 가계는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 계급으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의 하나로 올라선 한산 이씨이다. 목은이 태어난 해는 고려 충숙왕 15년이며 태어난 곳은 외가인 영해부(지금 경북 영덕) 괴시마을이다. 그는 외가에서 2세 때까지 자라다가 고향 한산의 본가로 돌아왔다. 19세에 안동 권씨와 결혼하고 20세에 유학을 떠날 때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한 기간에 구재의 각촉부시에 참석해 재능을 과시한 바 있으니, 강화 교동의 화개산, 경기의 삼각산·감악산·청룡산, 충청도 서주의 대둔산 등지에는 그의 독서처가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앞서 언급된 바와 마찬가지로 고려 말에도 여전히 대둔산이란 지명은 일반적으로 사용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대둔산은 고대부터 널리 알려진 족보 있는 명산이란 것이다. 호남의 금강산이란 수식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적벽추풍이나 만추적벽만으로도 구름다리가 있는 대둔산을 찾으면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적벽추풍赤壁秋楓 불역열호不亦說乎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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