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뉴스레터] 겨울에 더 맛있는 맥주들

윤한샘 한국맥주문화협회장 2020. 11. 2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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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임페리얼 스타우트’, ‘동토의 땅’ 러시아 황실에 수출
독일의 ‘아이스복’ 맥주, 겨울 맥주의 최고봉

낮이 짧아지고 어둠이 길어지는 건 본능적으로 괴로운 일이다.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낮같은 밤을 살 수 있는 시대지만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어둑어둑한 겨울은 기분을 가라앉게 만든다. 게다가 엄습하는 추위는 몸을 움추리게 하고 옷 속으로 우리를 구겨 넣는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건 '온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속을 뜨끈하게 만드는 김치찌개, 그리고 넓은 글래스에 담겨 있는 맥주 한 잔은 겨울을 견디게 하는 따뜻한 지원군이다.

아니, 이 겨울에 맥주가 지원군이라고? 한 여름의 시원한 맥주만 떠올리는 분들에게 겨울 맥주는 얼척없는 이야기로 들릴게다. 하지만 맥주는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수 천년 동안 인간과 오랜 겨울을 함께 나며 사시사철 도움을 주던 맥주에게 '겨울용'이 없을 리 없다. '윈터 워머'(winter warmer), 마치 아이언맨 수트 같은 별명을 가진 이 맥주들은 날카로운 겨울 바람을 두렵지 않게 한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윈터 워머 군단을 대표한다. 8% 이상의 알코올을 갖고 있는 이 스타우트는 18세기 영국에서 차디찬 러시아로 수출되던 맥주였다. 러시아 황제들은 높은 알코올을 가진 까만색 포터와 스타우트를 사랑했다. 황제라는 뜻의 임페리얼(Imperial)이 붙은 것은 이 맥주를 즐긴 러시아 황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으리라. 높은 알코올은 당시 장기 수송을 위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보드카를 즐기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요소였다.

사무엘 스미스 임페리얼 스타우트 (출처 : 윤한샘)

칠흑같은 까만색, 임페리얼 스타우트의 색은 긴 겨울밤과 어울린다. 묵직한 다크 초콜릿과 섬세한 견과류 향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깊은 쓴맛과 뭉근한 단맛은 이 맥주를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영국의 클래식한 임페리얼 스타우트가 기품을 갖고 있다면 알코올 10%가 훌쩍 넘는 크래프트 씬의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반짝이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카카오 닙스, 로스팅된 커피, 바닐라 빈을 넣은 버전은 깊고 부드러운 향미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주는 반면, 블루베리, 라즈베리가 들어간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발랄한 재미를 선사한다. 금새 어두워지는 겨울밤, 혼자 즐기기에 이 보다 더 적합한 맥주가 있을까?

임페리얼 스타우트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라면 발리 와인(Barley wine)은 아이러니하고 요상하다. 와인이라는 고상한 이름과 달리 이 맥주는 19세기 말까지 영국 시골에서 양조했던, 알코올이 높은 맥주를 의미했다. 장기 보관을 위해 알코올을 높였고 나무 배럴에 담아 지하에 보관했다. 이런 이유로 스톡에일(stock ale) 또는 올드에일(old ale)로 불리기도 한다. 겨우 내내 배럴에 있었기 때문에 셰리향(sherry)과 같은 미묘한 산화취가 있었고 프루티(fruity)한 향도 도드라졌다. 20세기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던 이 맥주는 최근 크래프트 맥주로 부활해 당당히 윈터 워머에 합류했다.

올드 포그 혼 발리와인 (출처 : 윤한샘)

알코올이 높은 맥주가 즐비한 벨기에에도 윈터 워머 군단을 이끄는 맥주가 있다. 어둡고 불투명한 마호가니 색, 효모와 몰트가 만들어내는 건자두와 블랙베리 향이 멋진 쿼드루펠(Quadrupel), 1991년 네덜란드 라트라페 수도원에서 탄생한 이 맥주보다 더 매력적인 윈터 워머는 찾기 힘들다.

라 트라페 쿼드루펠 (출처 : 윤한샘)

10% 알코올이 기본인 이 맥주는 묵직한 바디감을 가지고 있지만 끈적이지 않고 깔끔하다. 부드러운 단맛과 낮은 쓴맛 그리고 섬세하지만 풍성한 탄산은 이 맥주를 마시기 편하게 한다. 건자두, 블루베리 쿠키, 화이트 초콜렛 같은 간단한 페어링은 언제나 진리이며, 심지어 고르곤졸라, 블루 도베르뉴와 같은 강력한 향을 지닌 블루 치즈와 함께 해도 멋진 밸런스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테이블에 올리기 가장 좋은 맥주다. 믿어도 좋다. 당신의 이 선택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연 혹은 실수가 만든 보석같은 맥주가 있다. 19세기 말 독일, 한 겨울 배럴에 담겨 운송 중인 맥주들이 얼어 버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배럴 속에서 얼음이 된 맥주는 마시기 힘들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음 사이에 약간의 액체가 남아있었고 사람들은 이 액체가 주는 향기로움에 매료되었다. 영하에서 어는 물과 달리 맥주의 향을 품은 알코올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맥주를 아이스복(Eisbock)이라 한다.

슈나이더 아이스복 (출처 : 윤한샘)

그 어느 맥주보다 묵직하지만 비단과 같은 실키함이 느껴진다. 짙은 단맛은 후끈 올라오는 알코올 향과 밸런스를 이루며 말초신경을 흥분시킨다. 베이스 맥주에 따라 다양한 향이 존재하지만 모든 향이 우아하고 근사하다. 기본적으로 10% 정도의 알코올이 있지만 높게는 30% 이상의 알코올 갖는 아이스복도 있다. 이 스타일은 북극 탐험가를 위한 아크틱 에일(Arctic ale)로 음용되기도 했다. 아이스복이라면 겨울의 야외도 무섭지 않다. 겨울 야맥을 두렵지 않게 하는 아이스복은 윈터 워머 군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자유로운 크래프트 정신은 윈터 워머를 진화시켰다. 맥주와 이종의 술을 숙성했던 배럴이 만나자 아름답고 복합적인 향미와 높은 알코올이 탄생했다. 위스키나 브랜디, 럼, 데킬라를 숙성했던 배럴은 일반적으로 사용 후에 폐기된다. 하지만 맥주를 만나면 마법의 상자로 변신한다.

이 마법의 상자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맥주는 많지 않다. 임페리얼 스타우트, 발리 와인, 쿼드루펠 그리고 아이스복과 같은 맥주 만이 배럴 숙성에 적합하다. 배럴 속에 남아있는 강력한 알코올과 향미에 맞짱을 뜨기 위해서는 맥주 또한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강대강의 만남은 지구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놀라운 결과를 창조한다. 알코올은 강해지며 향은 더 복잡해지고 미묘해진다. 감히 우리 인간은 구체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환경과 시간이 만들어내는 마법을 지켜보고 즐길 수 밖에.

여러 분의 겨울을 위해 윈터 워머 군단 중 가장 진화적이고 아름다운 배럴 숙성 맥주를 소개한다.

구스 아일랜드 버번 카운티 (출처: 윤한샘)

구스 아일랜드 버번 카운티(Bourbon County)는 버번 배럴에 숙성된 가장 매혹적인 임페리얼 스타우트다. 진한 다크 초콜릿, 에스프레소, 바닐라, 볶은 견과류, 방금 구운 빵 그리고 오크향은 14% 알코올과 함께 멋진 밸런스를 이룬다. 묵직한 단맛과 농염한 마우스필은 입 속으로 모든 향을 부드럽게 이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와 버번 오크 배럴이 만든 이 놀라운 맥주는 가히 윈터 워머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벨기에 트라피스트 수도원 시메이에서 만든 시메이 그랑 리저브(Chimay Grande Reserve)는 오크 배럴에 숙성 된 쿼드루펠이다. 이 특별한 버전을 위해 위스키와 꼬냑 등을 담았던 오크통이 매년 다르게 사용된다. 건포도, 블루베리, 바닐라 그리고 섬세한 오크향이 10% 알코올과 함께 부드럽게 입안을 물들인다. 바디감은 무겁지만 비단과 같은 질감은 놀라운 복합성과 훌륭한 밸런스를 받쳐주며 이 맥주를 기품있게 만든다. 겨울을 위해 수도사들이 만든 선물에 감사의 박수를.

랑상블 디 몬탈치노 (출처 : 윤한샘)

영국 전통 발리 와인이 사라진 시대, 하지만 크래프트 맥주 씬은 발리 와인을 새롭고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몰트가 중심인 발리 와인에 화려한 홉향을 입히고 와인 숙성 배럴에 담아 진정한 윈터 워머의 여왕을 창조했다. 랑상블 디 몬탈치노(L'emsemble di Montalcino)는 이태리 와인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배럴에 숙성한 발리 와인이다. 코코아, 건포도, 다크 초콜렛, 브라운 슈가 그리고 셰리향은 섬세한 오크향과 함께 이 맥주를 복합적으로 만든다. 13% 알코올은 부드럽게 느껴지고 높은 쓴맛은 짙은 단맛과 훌륭한 밸런스를 이룬다. 맥주와 와인의 훌륭한 마리아주다. 발리 와인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맥주.

겨울에 몸을 따뜻하게 만드는 술들이 있다. 소주나 위스키 같은 증류주는 추운 계절에 어김없이 떠오로는 술이다. 맥주는 이런 술에 비해 알코올은 낮지만 다채롭고 복합적인 향을 가지고 있다. 체온을 급격하게 올리지는 못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우리 몸을 따뜻하게 만든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 따듯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함께 하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맥주는 차가운 날씨에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술이다. 어쩌면 내 체온이 아닌 사람과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맥주가 이 윈터 워머라는 멋진 별명을 가질 만한 유일한 술일지도 모른다. 어느 때보다 추운 2020년 겨울, 사람과 맥주가 모두를 따뜻하게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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