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합성고무의 탄생

남보람 2020. 11. 24. 15: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남보람의 전쟁 그리고 패션-171]

1. 천연고무의 역사

고무를 고무답게 쓰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다. 중앙아메리카 아즈텍 문명권 사람들은 고무나무 진액을 굳혀 그릇이나 천에 발라 썼다. 고무를 잘 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다.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가 1839년 황을 첨가해 이전보다 튼튼하고 질긴 가황고무를 내놓았다.

찰스 굿이어 /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고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전 세계로 퍼졌다. 고무는 교전이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필요했다. 전투라는 특수환경에 맞춰 준비한 의식주(衣食住)와 무기, 장비, 물자에는 모두 고무가 들어갔다. 방수, 방풍, 방진, 방음, 신축, 유연의 기능을 두루 갖춘 재료는 고무 외에 다른 대체재가 없었다. 고무 사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생산량이 한정된 고무나무 진액, 즉 라텍스(latex)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천연고무 대신 합성고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기술은 이미 개발돼 있었다. 1931년 미국에서 화학물질(클로로프렌)을 이용해 합성고무를 만들었고 이를 1932년 듀폰(Du Pont)사에서 상품화해 공급을 시작했다.

2.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고무 위기'

미국은 고무가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천연고무는 항상 부족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고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민간 사용을 제한했다. 그래도 모자랐다.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을 영국, 프랑스가 식민통치하면서 라텍스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장악하면서부터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 해외 천연고무 공급의 90%가 끊겼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참전한 미국은 당장 무슨 수를 내야 했다. 셔먼 전차 한 대에 들어가는 고무만 해도 0.5t이었다. 항공기에는 1.5t이었다. 전함 한 대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개별 부품 중 2만여 개에 고무 75t이 들어갔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턱없이 부족했다. 가정에서 쓰던 고무장화까지도 모아야 할 형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고무 모으기 운동 포스터 /출처= ⓒ美제2차세계대전박물관
육해공군 복장을 입고 고무 모으기 운동을 하고 있는 소년 대원들 /출처= ⓒ美제2차세계대전박물관

3. 합성고무를 개발하라

미국은 합성고무 산업에 국력을 집중했다. 고무가 없으면 전쟁에 질 판이었다.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합성고무 산업을 육성했다. 고무비축공사(Rubber Reserve Company)를 설립해 고무의 수입, 생산, 판매 등을 중앙에서 통제하고 경쟁관계에 있던 굿리치(Goodrich), 굿이어(Goodyear), 유에스고무공업(United States Rubber) 등의 회사가 기술정보 협력을 하도록 했다. 미 정부는 고무공장, 석유화학회사, 대학연구소를 통합해 개발을 지원했는데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톱 브레인도 팀에 포함됐다. 초기 목표는 1941년 231t의 합성고무를 생산하기 시작해 1945년까지 매년 7만t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생산기반 시설을 갖추는 것이었다.

고무개발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된 지 8개월 만인 1942년 3월, 개발팀은 1933년 독일의 한 화학자가 개발한 스티렌-부타디엔 혼합방식(SBR)으로 합성고무를 만들 것을 제안했고 정부는 이를 승인했다. 정부는 이 합성고무의 명칭을 'GR-S(Government Rubber-Styrene)', 즉 스티렌을 이용해 정부에서 개발한 고무로 부르기로 했다. (오늘날에도 세계 자동차 타이어의 50% 이상이 GR-S 계열의 합성고무로 만들어지고 있다.) 1942년 후반기에는 미국 대부분의 대형 석유화학 회사, 연구소, 대학 등이 고무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200종 이상의 특허정보를 공유했다.

4. 10년이 걸릴 일을 10개월 만에

그러는 동안에도 합성고무 시제품들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정부 제시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이 처음 나온 것은 1942년 4월 파이어스톤(Firestone)의 공장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10년 이상이 걸릴 것을 10개월 안에 해냈다고 평가한다. 이후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른 공장들도 하나둘씩 제품 생산에 성공해 양산 체제에 들어갔다. 1942년 한 해 동안 합성고무 생산의 빅4인 파이어스톤, 굿이어, 유에스고무공업, 굿리치는 총 2241t의 합성고무를 생산했다. 최초 목표의 10배 정도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1945년에는 92만t의 합성 고무를 생산할 수 있었는데 이 역시 13배 이상 초과 달성이었다.

합성고무(좌)와 천연고무(우) /출처= ⓒ위기미디어커먼스

[남보람 정치학 박사, 전쟁사 연구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