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과거와 미래]⑨시장은 실패해도 시장의 방식은 실패하지 않는다 "평가하지 말고 공개하라"

허준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2020. 11. 24. 14: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오른쪽 2번째)이 청와대에서 교육개혁위원회로부터 직업교육과 교과과정개역 등 제2차 교육개혁안을 보고받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1995년 단행된 ‘5.31 교육개혁’은 대학설립 준칙주의와 정원 자율화로 대학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다른 주요 정책들을 살펴보면 대학의 다양화와 특성화, 학술 연구의 일류화, 대학 교육의 국제화, 대학평가와 대학 재정 지원의 연계라는 개혁안도 담고 있었다. ‘5.31 교육개혁’이 한국의 고등교육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은 사실이다. 어느 면에서 반세기 동안 자체적인 혁신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대학들이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혁신을 시도하도록 유도한 것이 가장 큰 성과다. 1995년 이후 수많은 대학 재정 지원 사업들이 진행됐고 대학들은 정부가 유도한 방향에 맞춰 교육 방향과 운영 방식을 개편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2018년 교육부가 운영했던 대학 재정 지원 사업만 해도 국립대학혁신사업(PoINT), 대학자율역량강화사업(ACE+), 대학특성화사업(CK), 산업연계교육활성화 선도대학사업(PRIME),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 여성공학인재 양성사업(WE-UP), 산학협력선도대학육성(LINC+) 그리고 두뇌한국(BK) 21플러스사업이 있다. 

재정 지원사업은 크게 특성화, 연구 중심, 산학협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가시적인 성과는 BK21 사업이다. 지난 1999년 시작된 BK21사업은 연구 중심 대학을 육성하고, 대학원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됐다. 7년 단위로 3단계 사업이 진행됐고 지난해 21년째를 맞았다. 2004년까지 QS 세계 대학 평가에서 100위권 안의 대학이 하나도 없던 상황에서 2018년 같은 평가에서 5개 대학이 100위 안의 대학으로 평가됐다. 또 과학논문인용색인(SCI)논문 수도 1999년 세계 18위 9400여 편에서 2016년 세계 12위 5만9000여편으로 6.27배나 늘었다. BK21 사업으로 대학이 시장 권력에 포획됐다는 비판과 정량 실적 중심의 평가로 수준 낮은 논문 양산한다는 문제를 야기했다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BK21 사업은 한국 대학의 전반적인 연구력 강화에 기여했고 대학이 국가의 지식 총량 증가에 기여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지난해 6월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서울 강남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BK21 사업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낸 핵심요인은 BK21 사업을 통해 연구 실적 평가에 ‘공개와 경쟁’이라는 시장의 방식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BK21 사업 이후 대학 교수들의 실질적인 연구 경쟁이 시작됐다. 다른 재정 지원 사업들이 대학 집행부의 제안서 잘 쓰기 경쟁이었다면, BK21 사업은 같은 분야 학과들 간의 경쟁, 대학 교수 개개인의 경쟁을 촉발했다. 다른 대학의 같은 학과 교수들이 어떤 논문을 쓰는지 관심을 갖게 됐고 논문 수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교수 개인의 연구 관련 지표가 공개되기 시작했고 연구를 통해 지식 생산이 가능한 교수인지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졌다. 연구 실적 공개는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 있었고 위신을 중시하는 교수들 개개인을 움직이게 했다. 연구 ‘경쟁’은 연구 실적 ‘공개’에 따른 결과의 성격이 강하다. 결국 대학의 변화를 이끌어 낸 힘은 ‘공개’였던 것이다.

미국에는 ‘가족의 교육권 및 프라이버시법(FERPA)’라는 법령이 있다. 부모와 학생들의 개인 정보 보호에 대한 광범위한 권리를 보장해 주는 법령이지만, 그 핵심 내용은 오히려 교육기관이 학생들의 정보를 당사자 동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우를 명확하게 정의해 주는 데 있다. 교육 개선 목적, 교육기관의 감사 또는 평가 목적, 재정 지원과 관련된 목적 등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교육을 더 잘하기 위한 목적에 대해서는 학생들의 정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법적 토대를 기반으로 개별 학생들의 가족 내력, 인종 정보, 진학 기록, 학업 성취, 취업, 임금 수준의 관계에 대한 전 생애 주기 분석이 가능하고, 이 같은 정보 공개와 분석을 통해 국가와 민간의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학생 정보는 정부 재정 지원 규모 결정에 대한 근거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 개인의 경우에는 대학별, 전공별 졸업생의 평균 소득을 기초로 한 30년 간의 등록금 투자 대비 임금을 순수익으로 계산하여 가장 투자 효과가 높은 대학 진학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사한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페이스케일(Payscale.com)의 2018년 자료에 따르면 졸업생들의 임금 수준을 고려한 미국내 최고의 투자 가치 대학은 스탠퍼드대로 나타났다. 그 다음 2위는 캘리포니아의 작은 사립대인 하비머드대, 공동 3위는 캘리포티아공대(칼텍)과 매사추세츠공대(MIT), 5위는 프린스턴대, 6위는 뉴욕주립 해양대학, 7위는 미육군사관학교, 8위는 다트머스대, 9위는 경영학과로 특화한 뱁슨대, 10위는 미해군사관학교로 조사됐다. 

미국 뉴욕주 브롱스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 해양대학. 뉴욕주리배 해양대학 제공

1위에서 5위까지 모두 1년 등록금이 5만 달러에 이르는 사립대들이라는 점과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대학들이 10위 안에 들어있다는 점, 취업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해양대와 사관학교들이 포함된 점, 평등성과 수월성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보통 주립대가 10위 안에 하나도 없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정부는 2019년 대학 재정 지원 사업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2018년에 진행한 대학자율역량강화사업(ACE+)과 대학특성화사업(CK), 산업연계교육활성화 선도대학사업(PRIME),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 여성공학인재 양성사업(WE-UP)을 대학혁신지원사업으로 통합해 대학기본역량진단을 통과한 모든 대학들에 포뮬러(계산식) 펀딩 방식을 통해 예산을 지원했다. 변화의 핵심은 개별 대학이 자율적으로 작성한 중장기 발전 계획과 이를 위한 종합재정투자계획과 투자우선순위를 존중해서 평가 없이 지원을 시작한다는 점과 사업 예산 책정을 영국의 대학 재정 지원과 유사하게 재학생 수, 교육비 환원율, 전임교원 확보율 등 여러 지표로 구성된 계산식(포뮬러)을 통해 결정한다는 점이다. 전체 지원 금액이 일반대학과 전문대를 합쳐 약 8500억 원 정도에 불과해 대학별 지원 금액이 평균 40억 원이 못 된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대학들이 자율적으로 설정한 교육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의 재정을 사용하는 방식은 대학 재정 지원의 새로운 시작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자율적인 혁신 체계를 어떻게 관리하고 유지할 것인가이다. 정부는 개별 대학들이 중장기 발전계획에 설정한 성과 지표의 달성 여부를 기준으로 성과를 관리한다는 기본 방침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 방법은 최선의 방법일까? 일반 재정 지원 방식의 대학혁신지원사업은 교육 개선을 위한 재정 지원의 성격을 띤다. 연구력 강화를 위한 BK 사업 운영에서 배워야 할 점은 대학의 변화, 더 구체적으로는 대학 교수들의 변화가 ‘공개’와 ‘경쟁’이라는 시장의 원칙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의 변화를 정부와 대학 간의 계약 관계에서 보지 말고, 실제 수혜자가 되어야 할 국민과 기업이 대학의 교육 현황을 상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연구 성과인 논문과 연구 보고서가 공개되듯이 교육 혁신의 성과인 개별 강좌 내용과 해당 강좌들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를 ‘공개’하는 것이 어떤 방식보다 효과적으로 대학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 

대학 강좌 공개의 장인 대학공개강의서비스(KOCW)를 활용한다면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학생 1인당 수십만 원에 불과한 재정 지원이 대학 교육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재정 지원을 조건으로 대학 교육을 ‘공개’하는 것이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될 것이다. 또 대학 교육의 평가는 졸업생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포함해야 한다. 중장기 발전 계획과 재정 투입은 학교의 발전이 아니라 학생들의 발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졸업생들의 대학 교육 만족도가 핵심 지표가 되어야 하며, 졸업 후 취업과 진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 

대학 본연의 역할은 교육이지만, 지금까지는 개별 대학과 개별 학과, 그리고 개별 교수가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평가해 오지 않았다. 대학이 생산해 내는 가장 중요한 결과물인 졸업생에 대한 분석도 없었다.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들은 제한된 정보만으로 대학과 학과를 결정했다. 지원하는 대학과 학과의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신뢰할 만한 정보도 제공되지 않았다. 이런 불투명한 정보 환경에서 국가의 재원이 불합리하게 사용되는 것이고, 사교육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는 것이며, 대학의 서열화와 같은 병폐가 공고해지는 것이다. 대학 혁신의 중요한 방향 중 하나는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다. 

교육 관련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이에 기반한 대학들의 공정한 경쟁 여건 조성이 필요하며 첫 걸음은 교육 관련 개인 정보 활용 규제 개선이다. 이를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 미국의 FERPA에 해당하는 한국 법령은 ‘교육 관련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특례법’이다. 이 법령에 명시된 개인 정보 공개 금지를 변경해 대학 평가기관에 한해서는 접근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고용노동부의 4대 보험 가입 정보와 연계해 졸업생들의 취업 현황을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강의계획서와 동영상 강의를 비롯한 교육 내용, 강의 평가 결과와 같은 강좌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만족도 조사 등을 표준화하고 공개하도록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교육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공개되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전면적인 온라인 학습의 시행은, 역설적으로 우리 대학의 교육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모든 교수들이 온라인을 통해 강좌를 운영하는 현 상황은 교육 내용을 ‘공개’할 수 있는 여러가지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의 연구 역량 향상이 개별 교수의 연구 실적 ‘공개’에서 시작 되었듯이, 개별 교수의 온라인 교육 내용을 일부라도 ‘공개’하는 것은 어떤 방식보다도 효과적으로 대학 교육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허준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이 연재는 지난 6월 5일 출판된 필자의 저서《대학의 과거와 미래》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허준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대학에서 공간 정보 취득, 관리, 분석, 시각화, 활용과 관련한 교육과 연구를 하고 있다. 미국 공간정보 벤처 기업에서 5년간 기술총괄이사로 일했다. 연세대 오픈스마트에듀케이션(OSE) 센터장, 교육부 한국형 온라인공개강좌(K-MOOC) 기획위원, 미래교육 실무 자문단, 국가 평생교육진흥원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코세라에서 ‘공간 데이터 과학과 응용(Spatial Data Science and Applications)’라는 MOOC를 운영하고 있다. 

[허준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jheo@yonsei.ac.kr]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