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극혐 '아재양말' 떴다..흰 양말 올려신는 MZ세대

한경진 기자 2020. 11. 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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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진의 뉴스백팩]
흰 스포츠 양말이 유행이다. 사진 출처는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의 스타일링 화보.

지난 14일 오후 경기 파주 신세계 프리미엄 아울렛의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매장. 할인 행사가 한창이었지만, 매대 한 켠이 휑하게 비어 있었다. 이날 가장 먼저 동난 품목은 스니커즈나 레깅스·티셔츠가 아닌 ‘양말’이었다. 매장에선 축구용 양말을 제외한 모든 양말이 다 팔려 나갔다. 특히 요즘 MZ(밀레니얼+Z·1980~2012년생) 세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끄는 ‘흰색 스포츠 양말’이 가장 먼저 매진됐다. 사흘 뒤 찾은 서울 중구의 한 백화점 나이키 매장에서도 흰 양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직원은 “현재 스포츠 양말은 들어오는 족족 다 팔린다”며 “구매 예약을 걸어달라”고 했다.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

한때 ‘마이클 잭슨에게만 허락된 패션 아이템’으로 통했던 흰 양말이 요즘 유행하고 있다. 운동화는 물론 스포츠 샌들, 가죽 구두, 하이힐에까지 흰 양말을 갖춰 신는 사람들이 늘었다. 소셜미디어(SNS)에는 여러 스포츠 브랜드의 흰 양말을 높게 올려신고 찍은 인증 사진이 잇따라 올라온다. ‘최악의 아재 패션’으로 꼽혔던 흰 양말은 어떻게 힙스터(hipster)들의 아이템으로 떠올랐을까.

과거 파리패션위크에서 포착된 흰 양말과 하이힐(왼쪽), 주말 아침 아저씨 패션같은 샤넬 스포츠 샌들과 나이키 양말, 운동복 바지. /스타일뒤몽드·인스타그램

◇쿨(cool)해진 스포츠 양말

요즘 유통 현장에선 나이키·아디다스·챔피온 등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박힌 흰 양말은 ‘매장 진열과 동시에 팔려나간다’는 말이 나올만큼 인기가 높다. 스포츠 양말은 MZ 세대가 열광하는 스니커즈의 ‘보완재’이면서, 집 주변에서 편안하게 입는 옷인 ‘원마일 웨어’ 트렌드에 걸맞은 품목이기도 하다.

흰 양말은 코로나 사태 이후 야외 스포츠 열풍으로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요즘 한강 공원이나 등산로·둘레길에서는 레깅스 위로 흰 스포츠 양말을 올려 신은 20~30대 남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투박하게 생긴 요즘 운동화(‘어글리슈즈’)나 등산화에도 잘 어울린다. 배다영 무신사 에디터는 “캐주얼한 운동화에 어울리는 스포츠 양말을 부츠나 로퍼(단화)와 같은 구두에 매치해 개성을 보여주는 이들도 늘었다”고 했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 스타일링 화보에 등장한 흰 양말들. /무신사

스포츠 양말 매출이 뛰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 신세계백화점 한다정 스포츠 구매담당자(바이어)는 “스포츠 양말은 한동안 유통 업계가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품목이었지만, 지난해 ‘스니커즈 열풍’ 영향으로 덩달아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신세계 통합 온라인 쇼핑몰인 SSG닷컴에 따르면 2018년 1.6%에 불과했던 스포츠 양말의 전년 대비 매출 신장률이 지난해에는 71.4%, 올해(1~10월)는 37.5%를 기록했다.

슈프림, 챔피온, 아디다스 스포츠 양말.

젊은 세대들은 더 나아가 흰 양말을 ‘타이다이(tie dye·홀치기 염색)’ 방식으로 물 들이며 취향에 따라 맞춤 제작하거나, 양말 여러 개를 꿰매 옷으로 만들어 입기까지 한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제작 과정을 올리고, 국내외 리셀(resell·재판매) 플랫폼에 이런 맞춤형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타이다이 나이키 양말. /삭스새미조닷컴

◇'관종' 소비 시대

스포츠 양말의 느닷없는 유행은 MZ 세대의 독특한 소비 성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양말에 앞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슈프림의 한정판 ‘벽돌’, ‘곰표 밀가루’ 패딩 점퍼, 재래시장 장바구니와 종이 쇼핑백 디자인을 본 뜬 발렌시아가 가방 등 온갖 ‘뜻밖의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인기를 끌었다. 젊은 세대가 이런 독특한 패션에 열광하는 일은 최근 몇 년간 지속된 현상이다.

한 유통업체 고위 임원은 “어떤 트렌드의 발생 원인을 연구하고 있으면, 금세 또 다른 ‘신박한(신기하고 참신하다는 뜻의 신조어) 유행’으로 대체된다”며 “알다가도 모를 MZ 세대의 취향을 쫓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기성세대만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몇년 전부터 해외 매체들도 아래와 같은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슈프림이 30달러에 판매한 한정판 벽돌

’슈프림 벽돌 이해하려고 노력 중. 진심, 이게 왜 존재하는 거지?’ 「영국 패션매체 데이즈드」

‘그래서 누가 발렌시아가의 975파운드(약 145만원)짜리 장바구니를 사는 걸까’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700달러(약 78만원)짜리 양말 모양 신발은 어떻게 패션계에서 가장 핫한 운동화가 됐나’ 「미국 경제매체 쿼츠」

'어떻게 700달러짜리 밑창 달린 양말이 패션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운동화가 됐을까'를 다룬 2017년 미국 경제매체 쿼츠 기사.

본지도 지난 2017년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슈프림이 출시한 벽돌, 야전삽 등이 순식간에 완판되는 모습에 놀라 패션계 ‘인싸템 현상’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다.

이런 상품들에서는 △소셜미디어에서 눈길을 확실히 끌 수 있는 디자인 △변두리·비주류의 하위문화를 새롭게 재해석 △엉뚱함과 유머러스함 등과 같은 특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온라인에서 논쟁·관심을 끌어 모으는 일명 ‘어그로’가 중요한 요소처럼 보인다. ‘미학적 디자인·실용적 기능’ 못지 않게 ‘소셜미디어에서의 주목도’가 소비의 기준이 된 것이다.

트렌드 분석가 알렉산드라 시만스카는 2016년 영국 일간 가디언에 “요즘은 럭셔리를 정의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관건은 ‘시각적인 주목도’를 얼마나 끌어 모으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관종’(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 소비 시대가 열린 것 같다는 말도 나온다.

(관종 패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아래 내용을 읽어보세요.)

◇아재양말 이해하려면 이커머스 알아야

소셜미디어에서 주목도 높은 상품이 인기를 끄는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슈프림은 벽돌 이후에도 숱한 한정판 제품들을 내놓으며 폭풍 성장했고, 지난 9일 운동화 브랜드 반스의 모회사인 VF코퍼레이션에 21억달러(약 2조3500억원)에 매각됐다.

대기업이 인수한 슈프림이 앞으로도 '쿨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뉴욕타임스의 지난 10일(현지 시각) 보도.

우선 패션매체 데이즈드 코리아의 이현범 편집장과 나눈 3년 전 대화를 다시 살펴보자. 당시엔 낯설었지만, 지금은 당연한 얘기들이 나온다.

Q. 요즘 유행 제품을 보면, ‘인터넷 어그로’가 필수요소처럼 보여요. ‘소셜미디어에서 얼마나 흥하느냐’가 중요해진 걸까요.

“몇 년 전부터 ‘인스타 프렌들리’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죠. 패션계가 진행하는 컬렉션이 요즘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보면 이해가 될 거에요. 과거에는 컬렉션을 위한 쇼 피스(하이패션은 오트쿠틔르 쇼를 해서 오트쿠틔르 피스가 있었습니다), 바이어를 위한 커머셜 피스로 구성됐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소셜미디어’를 통한 e커머스 시장이 가장 큰 판매처이자 마케팅 섹션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시작됐어요.”

“요즘은 단지 화제에 오르는 ‘입소문용 제품(바이럴 피스)’을 넘어, 충격과 논쟁을 부르는 ‘쇼킹 피스’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바이어들은 시즌마다 컬렉션 흐름을 짚어주는 (과장된) 옷을 ‘마네킹 피스’(마네킹에 입힐 옷)로 따로 구매 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아예 소셜네트워크와 e커머스 시장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제품이 필요해졌어요.”

명품 브랜드 구찌의 580만원짜리 미키마우스 탑 핸들 백은 슈프림 벽돌 못지 않게 패션 마니아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구찌

Q. 일종의 ‘인스타용 아이템’이네요. 옛날 ‘고품격 럭셔리’ 패션을 향유하던 세대는 이런 트렌드가 ‘얕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요.

“며칠 전 국내 한 온라인 패션 플랫폼이 사모펀드에 600억원에 팔렸습니다. 이제 오프라인 백화점, 기존 상권, 홈쇼핑 채널도 디지털 흐름을 간과할 수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미국·유럽 패션계에서 온라인에 예민한 10~20대 소비자층은 가장 큰 목소리로 의견을 내는 집단으로 떠올랐어요. 디지털 플랫폼과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주류’가 된 겁니다. 패션계는 이미 10~20대의 디지털 언어에 가장 빠르고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가 온 것 같다’고도 말합니다.” (2017년 10월 29일)

◇발가락 양말이 유행할지도 모른다

당시 이 편집장이 언급한 국내 온라인 패션 플랫폼은 W컨셉이었다. 그때만해도 이 회사를 모르는 독자가 많아 기사에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랬던 W컨셉은 무신사와 함께 국내 온라인 패션 플랫폼의 양대산맥으로 성장했다. 사모펀드 IMMPE가 지분 80%를 약 600억원에 사들인 이 회사는 3년이 지난 현재 3000억원대 가치로 매물 시장에 나와 있다.

디지털 플랫폼이 패션 유통의 ‘주류’가 됐다는 분석도 몇년 전까지 생소한 얘기였다. 샤넬이 카카오톡 선물하기 코너에서 화장품을 팔고, 에르메스가 온라인 쇼핑몰을 연 요즘 유통 환경에서는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말이다.

코로나를 계기로 관종 소비 트렌드는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패션쇼가 줄줄이 취소되고, 오프라인 명품 매장들이 셧다운 되면서 한 해의 주요 트렌드가 인터넷에서 결정되고 있다. 롯데백화점 김혜라 해외패션부문 상무는 “온라인으로 패션이 유통되는 큰 흐름 속에서 앞으로도 소셜미디어에서 주목받는 ‘반전 상품’들의 유행이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 나막신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벨기에 디자이너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타비 슈즈.

이러다 발가락 양말까지 유행하는 날이 오는 건 아닐까. 이미 벨기에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가 일본 나막신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신발이 최근 크게 유행했다. 국내에선 ‘족발 부츠'로 불리며 패션 마니아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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