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캐릭터 아이짱 본가 맞나요?" 도쿄 한 식당에 오타쿠들이..

도쿄/이태동 특파원 2020. 11. 24. 10: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캐릭터 아이돌 생일 이후 갑자기 성지(聖地) 돼

“문 열기 전부터 벌써 4팀이 예약 문의를 해 와서 안 된다고 했어요. 저분들도 3시간 뒤에 다시 오기로 했습니다.”

지난 22일 오후 4시 30분쯤, 도쿄 먹거리 골목 몬젠나카초(門前仲町)의 몬자야키 가게 ‘산큐(三久)’ 직원 쇼즈 도시히로(32)씨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개점 30분 전부터 성인 남성 3명이 가게 앞에서 줄을 설 태세로 서성거리자 “예약이 다 찼으니 8시쯤 다시 와 보시라”며 돌려보낸 참이었다. 점퍼 가슴 주머니에 노란 머리의 소녀 캐릭터 인형을 꽂은 남성 일행은 아쉬운 듯 온 길을 되돌아갔다. 쇼즈씨는 “주말에는 예약 안 하면 자리가 없다.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산큐 입구에 미야시타 아이의 브로마이드, 수건, 머플러, 열쇠고리, 인형, 쿠션 등 다양한 굿즈가 전시된 모습. 팬들이 가게를 찾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됐다. /이태동 기자

일본 전역에 코로나 바이러스 제3파(세 번째 유행)가 들이닥쳤지만 ‘무풍지대’ 산큐에선 요즘 이런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휴일인 지난 21~22일도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1~2층 테이블 9개가 쉴 틈 없이 손님을 받았다. 21일은 도쿄도에서만 하루 최다인 539명, 22일엔 391명이 코로나 환자로 확진된 날이었다. 근처에선 손님을 찾아 주인이 거리로 나와 호객을 하는 모습이 자주 연출됐지만 산큐는 예외였다.

1980년 시작한 산큐를 이어받아 20년째 운영 중인 2대 사장 이지마 유리(59)씨에게 비결을 물었다. 그동안 단골손님도 많이 보유했고, 음식에 자부심도 갖고 있는 그지만 ‘맛’이나 ‘서비스’ 대신 뜻밖의 대답을 내놨다. ‘성지 순례(聖地巡禮)’였다. 골목 구석의 좁고 낡은 40년짜리 몬자야키 가게가 누군가의 ‘성지’가 됐다는 것이다.

지난 5월쯤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미야시타’ ‘아이’ ‘아이짱’ 등의 이름으로 예약이 밀려 들어왔다. 이지마 사장은 “같은 이름으로 여러 번 예약이 잡히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런 이름의 예약 손님이 대부분 남성이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이짱’ 무리는 식당에 인형을 들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노란 머리 애니메이션 소녀 캐릭터였다. 몬자야키나 오코노미야키 등을 시켜 인형을 들고 인증샷을 찍었다. 인형 대신 미니 등신대, 배지 등이 활용되기도 했다.

'러브라이브 스쿨 아이돌 페스티벌 올스타즈'라는 모바일 게임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미야시타 아이가 몬자야키를 서빙하는 모습. /러브라이브 스쿨 아이돌 페스티벌 올스타즈 트위터

이런 모습이 잦아지자 원래 산큐를 찾던 단골손님들이 먼저 궁금증을 느꼈다. 직원들 대신 사정을 파악해 가게에 무리의 정체를 알렸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응원하는 오타쿠(オタク·특정 분야에 심취한 마니아)들이라는 것이다. 정확히는 ‘러브라이브 스쿨 아이돌 페스티벌 올스타즈’라는 모바일 게임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 한 명 미야시타 아이(宮下愛)를 응원하는 팬들이라고 했다.

‘러브라이브...올스타즈’ 게임은 애니메이션 아이돌 컨텐츠로 유명한 ‘러브라이브’ 시리즈 중 하나로 작년 9월 출시됐다. 여기서 미야시타 아이의 본가가 몬자야키 가게라는 설정이 공개된 게 발단이었다. 그가 직접 몬자야키를 서빙하는 장면도 나오면서 오타쿠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팬들은 ‘지역’, ‘건물 형태’ 등 공개된 설정을 증거 삼아 본가를 찾아 나섰고, 산큐를 지목했다. 그리고 5월을 전후로 순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는 일본에 코로나 긴급사태가 선언됐다 막 해제돼 불황이 심각했을 때였다. 40년 전통 맛집으로 지역민들에게 사랑받아온 산큐 역시 코로나 늪에서 허우적댔다. 앞서 3월 가게 단골로 유명했던 일본의 국민 개그맨 시무라 겐이 코로나에 감염돼 사망했고 매일 같이 찾아왔던 프로야구팬들도 리그 개막 연기로 발길을 끊으면서 가게가 비관으로 가득 찼다. 3~4월쯤 산큐 매출은 전년 대비 20%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반의반 토막이 난 것이다. 이지마 사장은 “나중에 알았는데 아이짱의 생일이 5월 30일이어서 팬들이 몰려왔던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이것도 잠깐의 유행 정도로 끝나고 말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산큐 2층에 걸린 직원들과 시무라 겐의 기념 사진. 이 가게 단골로 직접 메뉴까지 고안해줄 정도로 자주 찾아왔던 시무라 겐은 지난 3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했다. /이태동 기자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5월 대규모 방문 이후 오타쿠들 사이에서 만족스러웠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순례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졌다. 가게 측에서 팬들의 선물로 전시해놓은 미야시타 아이의 머플러, 수건, 쿠션, 열쇠고리 등이 명물로 소개되고 나서 팬들이 더 몰리기 시작했다. 물론 맛이나 서비스 같은 기본 요소가 부족했다면 어려웠을 일이었다.

결국 ‘오타쿠의 힘'은 산큐는 매출을 전년 대비 80%까지 회복(9월)시켰다. 코로나가 잦아들 줄 모르는 지금은 아예 오타쿠 손님이 주 고객이 됐다. 평일엔 오타쿠와 일반 손님의 비율이 7대3 정도 되고 주말엔 거의 모두가 미야시타 팬들이라고 한다.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엔 매일 같이 산큐에 아이짱이 등장하는 인증샷이 올라온다.

미야시타 아이 팬들의 '성지'답게 산큐 곳곳에 미야시타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메뉴판 위 시계 안을 장식한 미야시타 아이 캐릭터 그림. /이태동 기자

러브라이브의 존재도 몰랐던 이지마 사장과 점원들은 이제 먼저 찾아서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예비 오타쿠가 됐다. 이지마 사장은 “하도 자주 보니 이젠 소녀들이 다 내 딸 같다”며 “그중에서도 아이짱은 여신으로 모신다”고 했다.

오타쿠 예찬론도 늘어놓는다. 직원 쇼즈씨는 “오타쿠라 하면 갑자기 울거나 소란스럽게 한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가게에 오시는 팬들을 보고 이미지가 바뀌었다. 소중한 존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더 조심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지마 사장은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갑자기 든든한 후원자이자 영웅 같은 분들이 나타났네요. 20년을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이런 일도 찾아오나 봅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