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그림에 文士 20인의 찬사..15m 대작 '세한도' 공개
“우선(藕船·이상적의 호), 이것을 보게.”
1844년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유배지 제주에서 붓을 들었다. 외부와 단절된 귀양살이 5년 차. 58세 추사는 마른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두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를 그렸다. 유배지의 자신을 잊지 않고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준 제자 우선 이상적(1803~1865)의 인품을 칭송하며 답례로 그려 보낸 것이다.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그대는 나에게 귀양 이전이라고 더 해준 것이 없고, 귀양 이후라고 덜 해준 것이 없다.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聖人)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국민 품에 안긴 국보 ‘세한도(歲寒圖)’ 두루마리 전체가 일반에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4일 개막하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평안’을 통해서다.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91) 선생이 대를 이어 소중히 간직해오다 최근 국가에 기증<본지 8월 20일 자 A2면>한 것을 기념해 마련한 전시다.
어둑한 전시실 한쪽 벽면을 온전히 채운 ‘세한도’가 진한 문향(文香)을 뿜어낸다. 당초 추사의 그림은 70㎝ 길이였으나 청나라 문인 16인과 한국 문인 4인의 감상글이 보태지면서 전체 14.7m에 이르는 대작이 됐다. 두루마리 전체를 펼쳐 전시하는 것은 지난 2006년 이후 14년 만이다.
장대하게 펼쳐진 작품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가다 보면 ‘세한도’의 굴곡진 180년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추사에게서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감격해 그림을 품고 연경에 갔다. 이때 장악진·조진조 등 청나라 문인 16명의 감상 글을 받아온다. 이후 작품은 추사를 열정적으로 흠모하고 연구했던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수집해 주인 따라 바다를 건너갔고, 1944년 컬렉터 손재형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되찾아온 작품을 본 오세창·이시영·정인보가 쓴 찬문(贊文)도 길게 붙어 지금의 ‘세한도’가 됐다. 역경을 이겨내는 추사의 의지를 극도의 절제와 생략으로 담아낸 원작에다, 한·중 당대의 문인들이 쓴 감상문까지 더해져 국경을 뛰어넘는 동아시아 최고 걸작으로 거듭난 것이다.
초고화질로 스캔한 영상에선 추사의 치밀한 필법을 관찰할 수 있다. 한겨울의 황량한 느낌을 바짝 마른 까슬까슬한 붓질로 표현했다. 물기 없는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그리는 필법은 추사가 59년 동안 갈고 닦아 이뤄낸 필력에서 나온 것이다. 후지쓰카 지카시, 손재형 등 세한도를 지킨 사람들과 고(故) 손세기-손창근 부자의 기증 뜻을 새기는 공간도 마련됐다. 박물관은 “2부에선 19세기 그림 ‘평안감사향연도’를 함께 전시해 한겨울 추위인 세한을 견디면 곧 따뜻한 봄날 같은 평안을 되찾게 될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고 했다.
민병찬 관장은 “추사가 유배됐던 제주 대정읍은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제주에서도 가장 살기 어려운 곳이다. 그 고난과 외로움, 제자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낸 문인화의 걸작이 바로 세한도”라며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를 기꺼이 기증해 국민 모두 감상할 수 있게 해준 손창근 선생과 가족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내년 1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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