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랑으로 탄압 맞선 실천신학자 '오명걸' 기억합니다"

한겨레 2020. 11. 23. 19: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신이의 발자취] 고 조지 오글 목사님을 추모하며
인천 화수동 일꾼교회는 오는 28일까지 고 조지 오글 목사의 빈소를 운영한다. 이 교회는 고인이 1962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사무실로 마련했던 한옥 초가가 있던 자리다. 사진 일꾼교회 제공

1962년 기독학생회에서 첫 인연 손명걸 목사가 한국이름 지어줘 노동자·빈민·대학생 ‘선교’ 연대 “예리한 눈빛·위트 넘치는 토론”

2018년 민주화운동 사료도 기증

한국을 극진히 사랑했던 조지 오글(1929~2020) 목사님이 지난 15일 미국 콜로라도의 한 요양원에서 별세했다. 노년에 파킨슨병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부음을 접하는 순간 애도와 감사가 동시에 솟구쳤다.

내가 오글 목사님을 만난 것은 1962년 여름, 한국기독학생회 지도총무 손명걸 목사님의 사무실에서 였다. 손 총무님은 그때 대학생인 내게 오글 목사를 한국이름 ‘오명걸’ 선교사로 소개해 주었다. 두 분 이름이 같아서 잠시 놀랐던 기억도 난다. 손 총무님은 오글 목사님을 초청해 기독학생회 학생들과 세미나를 주선해 주셨고 나도 꼬박꼬박 참석해 친분을 쌓았다. 1970대에는 마태진 선교사와 고 조승혁 목사도 함께 어울리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오글 목사님은 만날 때마다 미국 조야에서 한국을 어떻게 보는지를 잘 요약해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인천을 중심으로 산업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예리하게 지적하던 모습도 새삼 떠오른다.

오글 목사님의 딸 캐시 여사는 최근 부음과 함께 부친의 삶을 정리해 알려주었다. 오글 목사님은 1954년 듀크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 미 연합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을 찾았다. 남부의 명문대학 듀크 출신이 한국전쟁으로 피폐한 나라에 선교하러 오다니 그의 명석한 판단과 담대한 결단이 돋보인다. 그는 대전의 호수돈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공주지역 감리교청년회(MYF)를 지도했다. 그때 마침 호수돈의 교목이었던 손명걸 목사님이 자신과 같은 한국이름을 지어줬고, 두 분은 평생 에큐메니컬 운동의 동지로 가깝게 지냈다.

오글 목사님은 한국이 산업화 과정을 밟게 될 것을 대비해 노동 관련 선교를 하기로 결심하고 1957년 시카고로 돌아가 에큐메니컬 웨스트사이드 크리스천 교구에서 목회와 공부에 전념했다. 1959년 아동복지회 간호사인 도로시 린드먼과 결혼한 뒤 두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1961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창립했다. 1962년 인천 화수동에 있는 초가 한옥(현 일꾼교회)을 선교회 사무실 겸 노동자의 집으로 마련했다. 그는 한국 산업선교의 걸출한 지도자인 고 조승혁 목사와 조화순 목사를 배출했으며, 10년 동안 열성을 다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했다. 특히 노동자들의 산업안전·임금·신상 문제 등을 해결할 지름길은 노동조합운동이라 판단하고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그 시기 오글 목사님을 비롯한 산업선교와 빈민선교 활동가 그리고 나를 포함한 학원선교 운동가들이 자주 만나 민주화와 인권운동 그리고 인간화를 위해 연대했다. 그는 눈썹이 수북하고 굵은 안경테를 통해 응시하는 눈빛이 매력적이었다. 항상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열띤 토론을 즐기며 위트가 넘치는 분이었다. 사회적 영성이 풍부한 성직자요, 고난의 좌절과 기쁨을 체화한 실천신학자인 동시에 불의와 탄압에 저항하는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오글 목사님은 1971년 미국으로 건너가 위스콘신대학에서 국제산업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73년 가을학기부터 서울대 상대에서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관련 강의를 맡아 세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북미주 소속 선교사들의 ‘월요저녁모임’에 참석해 선교적 현안을 함께 논의하고 한국 상황을 국외로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널리 알려진, 강제 추방 사건이 터졌다. 1974년 10월 종로5가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첫 번째 목요기도회 때 오글 목사님은 인혁당 조작 사건 사형수 부인들의 부탁을 받고 기도를 올렸다. ‘예수님은 우리들 형제자매 중 가장 보잘 것 없고 약한 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 감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혹독한 형을 받은 8명이 있다는 것, 증거가 없는데도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 그들이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우리들 중 가장 약한 자로서 예수의 형제가 되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 그들은 사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것….’ 바로 다음날 남산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오글 목사님은 20시간 동안 불법 조사를 받았고, 이어 11월 인혁당 관련 부인들의 이야기를 알려 <뉴욕타임스>에 기사가 났고, 결국 12월14일 정보원들에게 이끌려 홀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오글 목사님은 이듬해부터 미 조지아주의 에모리대학 캔들러신학대학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그러다 1975년 4월9일 새벽 인혁당 사건 사형수 8명이 전격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신학대학원의 핏츠도서관에서 전해 듣었다.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낀 그는 조용히 지내고자 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했다. 그때부터 미국 전역을 돌며 인혁당 사건의 전말과 한국의 인권 탄압 실태를 알리며 1977년에는 <갇힌 자에게 자유를> 책도 펴냈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노동조합 지도자들, 함께 도시산업선교를 했던 조승혁·조화순·유흥식·원용훈·최용해·김경락·조지송·안광수 목사에게 전하는 감사와 사랑의 인사도 담겨 있다.

2018년 9월 고 조지 오걸 목사와 부인 도로시는 연합감리회 부총무 레비 바티스타(오른쪽)를 통해 필자 안재웅(왼쪽) 이사장에게 한국 민주화운동 사료를 전달했다. 사진 안재웅 이사장 제공

오글 목사님은 1981년까지 에모리대학에서 강의한 뒤 91년까지 10여년간 연합감리회 사회국 사회경제정의 담당 디렉터로 와싱턴 디시에서 일했다. 말년에는 콜로라도 라파예트에 정착해서 18년 동안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지난 2018년 9월 도로시 사모님은 한국을 자주 방문하는 연합감리회 부총무 레비 바티스타 박사를 통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전달해 달라는 큰 봉투를 내게 전해주었다. 사료관 실무자가 개봉한 봉투에는 원진레이온 노조 포스터를 비롯해 귀중한 자료가 들어 있었다.

한국인의 영원한 친구 오글 목사님의 헌신적인 삶에 다시한번 경의와 감사를 드리며 천국의 안식을 기원한다. 아울러 도로시 사모님과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평강이 함께하기를 기도한다. 안재웅/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