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웃음'만 그리는 작가..팬데믹에 찾아온 예술가들

노형석 2020. 11.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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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유에민쥔: 한 시대를 웃다'
중국 전위작가 4대천왕 중 한명
작품 40여점 한국 첫 대규모 개인전
실없는 웃음 군상으로 스타 반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내년 3월28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중국동시대미술전'
주진스·쑹둥·류웨이 3인전
한반도 소통 기원한 '거대터널'
작가가 2009년 그린 대작 <잔디에서 뒹굴다>. 개혁개방 뒤 자본주의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중국의 사회 현실을 웃는 인간 군상들의 몸짓으로 통렬하게 풍자한 작가의 전기 대표작 중 하나다.

이 남자는 어떤 우환거리를 숨기고 있을까.

팬티만 걸치고 쪼그린 남자의 조각상에 다가가자 의문이 생겼다. 얼굴은 입을 쫙 벌리고 웃는 표정인데, 정작 몸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수그린 채 고심하는 자세다. 그의 뒤엔 역시 쪼그린 채인 두 남자의 상이 자리한다. 양팔을 겹쳐 ‘격하게’ 팔짱을 끼거나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입 벌리며 웃는 모습이다.

‘웃음이 웃음이 아니다’가 세 조각상의 제목이다. 1990년대 이래 입 벌리고 허망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만을 그려 유명해진 중국 현대 미술가 유에민쥔(58)이 2012년 만든 입체상 연작이다. 스테인리스 강판을 누더기처럼 잇대어 붙여 머리와 몸통을 만들었다. 그래서 웃는 표정의 공허함과 씁쓸함이 더 증폭된다. 제목대로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멀리서 보면 ‘파안대소’인데 가까이서 보면 헛웃음이다.

묘한 위안이 느껴지는 이 누더기 스테인리스 고뇌상은 지난 20일부터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 펼쳐놓은 ‘유에민쥔 개인전: 한 시대를 웃다!’(한겨레신문사 주최, 내년 3월28일까지)의 주요 출품작이다.

전시장 들머리에서 관객을 맞는 유에민쥔의 대표작인 <처형>. 19세기 거장 고야의 대작 <1808년 5월3일>의 도상을 끌어들여 1989년 천안문 대학살 사건을 풍자한 작품이다. 학살당하는 이나 가해자나 실없이 웃기만 하는 인간 군상들로 채워 중국 지식인의 무기력한 상황을 냉소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실물을 전사한 복제화가 내걸렸다.

유에민쥔은 2000년대 이후 세계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차이나 아방가르드(중국 전위작가) 4대천왕’ 중 한명이다. 1989년 천안문 대학살 이후 무기력증에 빠진 중국인의 자화상을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얼굴 군상으로 표현하며 세계 미술 시장에서 스타 작가가 됐다. 국내에서도 그의 웃는 남자 이미지가 대학가 등에서 이미테이션 상품으로 팔려나갔다. 더욱이 이번 전시는 그가 2000년대 이후 새로운 회화적 지평을 모색하면서 그린 근작들과 조각 40여점을 처음 소개하는 국내 초유의 대규모 개인전이다.

늦가을 코로나19 사태로 뒤숭숭한 국내 미술판에 중국 현대미술 기획전이 잇따라 차려지고 있다. 유에민쥔 전시에 앞서 부산시립미술관은 지난 9월 말부터 ‘중국 동시대 미술 3부작―상흔을 넘어’란 제목으로 중국 현대미술의 세대별 대표작가인 주진스, 쑹둥, 류웨이 3인전을 진행 중이다. 이달 초 끝난 부산비엔날레에서도 중국 현지 팬데믹 치료 현장의 급박함을 작품으로 소개한 중국 청년작가 리빈유안의 미디어 영상 드로잉 전시가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 현대미술은 2000년대 초 한국 미술 시장이 거품 호황을 누릴 때, 새로운 블루칩으로 국내 화랑가에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와 다른 이질적인 규모와 색채감이 거칠고 조야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속히 관심에서 멀어졌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조명되는 중국 현대미술은 기존 평가와는 좀 다르게 다가온다. 현장 기획자들은 불안정한 현실 상황에 맞춤한 인간적 호소력이 새삼 돋보인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 펼쳐진 유에민쥔의 첫 국내 개인전에 나온 스테인리스 강판 연작 조각상 <웃음이 웃음이 아니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온갖 고뇌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단면을 머리를 싸매는 등의 과장된 몸짓으로 풀어냈다.

■ 허망한 웃음 대신 우주와 만물로 관심 돌리다

서울 예술의전당에 개인전을 차린 유에민쥔은 국내에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은 적이 없다. 중국 현대미술의 4대천왕이나 팝아트 계열 작가 정도로만 알려졌다.

유에민쥔과 20년 넘는 지기로 이번 전시를 준비한 윤재갑 기획자(중국 하우아트뮤지엄 디렉터)는 이런 편견을 걷기 위해 전시의 틀을 새로 짰다. 이념과 자본화를 비판하며 전위적인 면모를 보인 2000년대 초반까지의 전기, 우주와 만물에 대한 관심의 확장을 모색하는 최근의 작업 경향을 담은 후기로 크게 나눠 다섯개의 섹션으로 전시를 구획했다. “초기 작품은 이념 권력과 자본 권력에 맞서는 아나키즘과 전위적 비판을 토대로 한 웃는 군상 작업이라면, 후기 작품은 코로나 사태를 부른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작품이 손꼽힌다”고 윤재갑 기획자는 설명했다.

들머리에서 우선 눈길을 끄는 작품은 <처형>(1995)이다. 19세기 거장 고야의 대작 <1808년 5월3일>의 도상을 끌어와 1989년 천안문 대학살 사건을 풍자한 작품이다. 천안문을 상징하는 빨간 담 아래 학살당하는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실없이 웃기만 하는 모습으로 채워 중국 지식인의 무기력한 상황을 냉소한다. 실물을 전사한 복제화가 내걸렸는데, 고야의 대작 이미지와 함께 배치돼 체제와 이념에 대한 비판이 웃는 얼굴 군상을 추동한 배경이 됐음을 알려준다. 첫번째와 두번째 방은 이런 맥락에서 풀밭을 뒹굴거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멍하게 웃는 군상을 담은 전형적인 작품들을 배치하지만, 세번째 방 ‘사의 찬미’부터는 해골이나 해골 눈 속에 웃는 군상이 들어 있는 연작으로 변화한 2010년대 이후 작업이 등장한다.

전시장 맨 끝 출구 앞에 설치된 인물 군상 조각 <낭만주의 & 현실주의>.

특히 다섯번째 방 ‘일소개춘’에 나온 그림들은 웃는 얼굴상이 뭉개지고 분열되면서 다른 유형의 생명체로 변화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한번 크게 웃으니 온 세상이 봄’이라는 뜻의 ‘일소개춘’이란 선불교적 화두를 바탕으로 작가의 자화상이나 인물 군상이 명화 속 인물이나 동물, 식물로 변신하는 초현실적인 도상이다. 웃음 띤 얼굴은 텅 빈 채 하늘과 구름을 담은 그림자가 되기도 하고, <백합>처럼 꽃송이나 서구 르네상스 명화 속 인물로 변신하기도 한다. 윤 기획자는 “노장사상에 바탕해 인간의 이기심으로 개발과 파괴를 조장해온 기존의 관점을 반성하고 우주 만물과 합일하려는 흐름이 최근 유에민쥔 작업에서 도드라지는데, 이런 부분을 담은 신작과 근작을 다수 전시한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소개했다.

일반 관객에게는 마음대로 잡담하면서 작품을 만질 수 있는 네번째 방 ‘조각광대’가 눈길을 끌 것으로 보인다. 고뇌하는 누더기 조각상과 함께 활짝 웃는 사람의 얼굴, 코뿔소 같은 야수의 얼굴을 함께 접붙인 ‘인간-야수’가 기다린다. 전시장 맨 끝에는 최지만 도예가가 유에민쥔과 협업해 인간 군상을 백자 태토로 빚거나 머리 위에 백자를 놓은 이색 작업을 선보인다.

전시장 세번째 방 ‘사의 찬미’에 나온 작가의 해골 연작 중 일부인 <연인 1>(2012). 작가는 2010년대 이후 웃는 얼굴 군상들을 내려놓고 해골 군상들을 화폭에 올리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형상화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전시에서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작업이다.

■ 들어가 체험하고 만지며 느껴보는 인간의 미술

“여기 누워도 되나요?” “한번 누워보세요. 느낌이 좋아요.”

부산시립미술관 2층 ‘중국 동시대 미술 3부작’전 서두에서는 중국 현대미술가 쑹둥이 지은 거대한 판잣집 모양의 설치 작품에 들어가 몸을 누일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지혜―비둘기와 함께 생활하기>란 제목의 이 작품은 지붕에 만든 비둘기 사육장을 가난한 주민들이 침실 등의 주거 공간으로 삼게 된 사연을 담은 작품이다. 실제로 딱 몸을 누일 만큼인 공간에서 이곳을 침실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생각해보게 된다. 어려운 주거 여건 속에서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예지와 강인한 생활력을 형상화한 이 설치물은 2005~2006년 작품을 작가와의 온라인 협의를 통해 재현했다. 쑹둥은 당국의 통제로 대외 활동이 어려워지자 아파트 공간 안에서 밀도감 있는 실험 작업을 하는 ‘아파트먼트 아트’라는 흐름을 만들어낸 주역 중 한명이다.

부산시립미술관 2층에 선보이고 있는 중국 아방가르드 1세대 작가 주진스의 대작 <남과 북>. 1만3200장의 중국 전통 종이를 잇대어 길이 24m의 거대한 터널 조형물을 만들었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과 북, 여전히 심각한 지구촌 동서 불균형 문제의 소통과 해결을 기원하면서 만든 작가의 대표작이다.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 1세대의 대표작가로 1980년대 초반 전위 미술운동을 시작한 주진스는 1만3200장의 중국 전통 종이를 잇대어 길이 24m의 거대한 터널 조형물을 만들었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과 북, 여전히 심각한 지구촌 동서 불균형 문제의 해결을 기원하는 대표작이다. 1972년생 3세대 작가인 류웨이는 엉덩이를 드러낸 남성의 알몸을 전통 산수화처럼 구성한 독특한 평면 작업과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폐기된 가구나 건물 부속물의 잔해, 고급 가전제품을 해체해 재구성한 설치작업 등으로 중국 도시화와 자본화가 남긴 상흔을 미학적으로 재해석해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 서양 현대미술을 접하면서 불과 30여년 만에 새로운 관점에서 중국의 현실을 현대미술의 어법으로 표현해낸 세대별 대가 3명의 주요 작품에선 인간적인 내음은 물론 대륙 작가 특유의 통 큰 스케일이 느껴진다.

부산시립미술관 ‘중국 동시대 미술 3부작’전에 나온 중국 현대미술가 쑹둥의 설치 작품인 <가난한 자의 지혜―비둘기와 함께 생활하기>. 집 지붕에 만든 비둘기 사육장을 주거공간으로 쓰면서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예지와 강인한 생활력을 형상화했다. 2005~2006년 만든 작품을 작가와의 온라인 협의를 통해 재현했다.

사실 그간 중국 작가의 한국 전시는 인기 작품이나 명품 소개 정도로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올가을 기획된 유에민쥔전이나 부산시립기획전은 기존 관행을 넘어 중국 현대미술가들의 실체를 온전하게 부각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념이나 자본의 압박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상력은 결코 옭아맬 수 없다는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은 언제든, 어느 때든,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된다는 것을 서울과 부산에 나온 중국 현대 작가의 다채로운 작품들이 새삼 일러준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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