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에 '반동의 씨암탉' 몰려 처형되면서도 "신도들 살려달라"

권경성 2020. 11. 2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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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여성 전도사 문준경 순교지 신안 증도
19일 전남 신안군 증도면 해안 도로변에 조성된 개신교 문준경 전도사 순교 묘역. 묘지 주변으로 5개의 비석이 서 있고, 벤치 2개가 설치돼 있다.

“70년 전에는 백사장이었어요, 이 아스팔트 도로가. 거기에 문준경 전도사의 피가 뿌려졌지요.”

비가 지나간 19일 오후 전남 신안군 증도면 문준경(1891~1950) 전도사 순교지. 묘역은 작은 공원이었다. 묘지를 등지고 벤치에 앉으면 왕복 2차로 해안 도로 너머 바다가 펼쳐졌다. 갯벌을 삼키며 물이 밀려왔다. 박문섭 방축리교회 장로는 검은 추모비를 가리켰다. ‘병든 자의 의사, 아해 낳은 집의 산파, 문맹 퇴치 미신 타파의 선봉자, (…) 모든 것을 섬사람을 위하였고 자기를 위하여는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었다. 그대의 이름에 하나님의 은총이 영원히 깃들기를. 우리들의 어머니.’ 문 전도사를 기리는 글귀가 선명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옆에 놓인 왕복 2차선 도로. 1950년 순교 당시에는 백사장이었다. 묘지를 등지면 썰물 때 갯벌이 되는 바다가 도로 너머로 보인다.

생애 내내 자식 같은 신도들을 돕느라 분주했던 ‘섬 선교의 어머니’는, 죽음 또한 대속(代贖)이었다. 문 전도사가 속한 개신교단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섬이 북한군에 점령되자 주변의 만류를 끝내 뿌리치고 증도로 되돌아갔다. 사지(死地)임을 그 역시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성도들을 버릴 수 없었다. 결과는 우려대로였다.

문 전도사의 최후는 비참했다. “1950년 10월 5일 공산군은 문 전도사를 백사장으로 끌고 온 뒤 죽창으로 찌르고 발길로 차고 총대로 후려쳤다. 문 전도사는 ‘나는 죽이더라도 성도들은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다. 창으로 온몸을 찔러도 문 전도사의 숨이 끊어지지 않자 공산당은 목에 총을 쐈다. ‘너는 반동의 씨암탉 같은 존재라 처형한다’는 게 그들의 얘기였다.” 백사장에 함께 끌려갔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고(故) 김두학 증동리교회 장로가 남긴 증언이다. 문 전도사는 순교 직후 증동리교회 뒷산에 매장됐다가 2005년 지금 자리로 이장됐다.

문준경 전도사 영정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공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은 순교터에서 불과 400m 떨어진 언덕에 2013년 세워졌다. 기념관 배후는 증도와 부속 섬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정봉이다. 생전 문 전도사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외벽 글귀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이다. 3층짜리 건물 곁에 대형 십자가가 우뚝하다.

19일 전남 신안 증도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로부터 400m 떨어진 언덕에 세워져 있는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앞에 박성균 우전리교회, 고영달 방축리교회 담임목사가 섰다.

문 전도사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 1, 2층은 교단과 문 전도사에 대한 기록이다. 의외로 유품은 많지 않은데, 그건 섬 전체가 고인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문 전도사는 일제강점기 소작 쟁의 사건(1923)으로 유명한 신안 암태도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1932년부터 근 20년간 증도 주변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신앙의 씨를 뿌렸다. 시집온 증도는 개신교 불모지였다. 그의 역할은 마을의 사제(司祭)나 목자에 머물지 않았다. 의사, 간호사, 산파, 유모, 배달부 등 섬 주민이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 다했다. 기념관 2층에 만들어진 ‘노둣길(썰물 때에만 드러나는 갯벌 징검다리)’ 체험은 그 증거다. 한 해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도록 이 섬, 저 섬 드나들었던 문 전도사의 활약상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이런 고생은 헛되지 않았다. 2018년 기준 증도면 인구는 1,996명. 그런데 개신교 교회만 11개, 그중 성결교회가 10곳이다. 사찰이나 성당은 없다. 문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는 증동리교회와 대초리교회, 2곳이다. 나머지는 교회가 멀어 여기저기 만든 ‘기도처’들이었다. 목사나 전도사 없이 집사가 예배를 이끌었다. 우전리교회, 방축리교회가 그렇게 만들어진 교회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보이는 게 문 전도사 동상이다.

증도를 넘어 신안군 전체로도 그렇다. 1,004개의 섬으로 이뤄졌다는 신안군 내에는 190여개 교회가 있고, 이는 인구 대비 개신교 단체 밀도를 전국 최고로 끌어올렸다. ‘복음화율’도 가장 높은 35% 수준이다. 박 장로는 “섬들이 많다 보니 원래 문화 자체가 폐쇄적이고, 풍어제(豐漁祭)를 지낼 정도로 미신도 많고, 가부장제가 말도 못하게 강하던 1930, 40년대에, 여자가 남자들 앞에 나서서 복음을 전파하는 건 상상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엔 모두가 동의했다. 고영달 방축리교회 담임목사는 “당시 열악했던 시대나 지역 상황을 감안하면 사실상 해외 선교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일 전남 신안군 증도면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박문섭 증동리교회 장로가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 전도사가 낳은 목회자와 장로만 해도 700여명에 이른다.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설립한 김준곤(1925~2009), 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이만신(1929~2015), 개신교식 치유 상담의 선구자 정태기 목사 등이 그의 제자다. 문 전도사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데에는 이들 제자들의 기여가 상당하다.

문 전도사의 개신교 입문에서부터 순교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조선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용감하고 과감한 선교 활동은 당시로선 찾아보기 힘든 여성 리더십이지만, 대지주 집안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아이를 낳지 못한 며느리로 살아야 했고, 그 며느리가 개신교 신앙 공동체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옆에는 대형 십자가가 우뚝하다.

“남편이 없고 자식이 없는 그에게는 예수가 남편이었고 교인이 자식이었다. 가정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천국을 위해 더 아름답게 일할 수 있었다”고 마냥 추어올리기엔 일평생 가부장 관습과 일제, 공산당에 핍박 받았던 그의 일생은 지나치게 고단했다. 문 전도사 묘역엔 다시 옅은 비가 흩날렸다.

글ㆍ사진 증도(신안)=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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