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살생존자입니다"

노도현 기자 2020. 11. 2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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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황웃는돌 작가의 <나는 자살생존자입니다>의 한 장면/ 황웃는돌 제공


“어떤 유가족은 자살이 깜빡이 없이 끼어드는 차를 보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자살예방센터 간호사가 말했다. “아니요.” 황웃는돌씨(28·필명)가 고개를 젓는다. “중앙선 침범에 가까워요. 정면으로 나를 향해 오는데 피할 길이 없죠.”

6년 전 아버지를 잃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황씨가 일하던 카페에 찾아와 선물을 내밀었다. 파리만 날리던 곳이 그날따라 만석이었다.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했지만 사양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황씨는 지난 5월부터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웹툰 <나는 자살생존자입니다>(연재처: 인스타 @hwang_smiling_stone, 트위터 @Smiling_Stone, 포스타입 , 딜리헙 )를 연재하고 있다. 자살생존자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자살자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또 다른 자살생존자는 남편을 자살로 잃은 경험을 에세이로 풀어냈다.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는 10년째 자살예방 상담사로 활동하며 희망을 전하고 있다. 이들에게 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건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들었다.

너도 네 인생 살아야지, 잊을 때도 되지 않았니, 이제 그만 거기 붙들려 살지 마…. 자살생존자들이 수없이 들었을 말. 황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런 어쭙잖은 위로가 ‘유가족에게 상처가 되는 말 TOP3’쯤 될 거라 했다. 잊는 건 불가능했다. 묻고 살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

장례식 때도 울지 못했다. 감당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여러 소송과 생활고를 맞닥뜨렸다. ‘정신차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콜센터, 노점, 공장, 과외 등 잡다한 이력이 쌓여갔다. 투잡, 스리잡, 파이브잡까지 뛰었다. 슬퍼할 겨를도, 무너질 겨를도 없었다. 후폭풍이 온 건 5년이 지나서였다. 지난해 12월 자신도 생을 마감하려 했다. 모든 일을 마무리했으니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애도 작업을 하지 못했고, 너무 나를 누르면서 살았구나 깨달았어요. 저한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문제가 있는 걸 알면서도 외면을 했던 거죠. 내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내려놓고, 아버지의 애도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자살생존자로서의 자전적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고 있는 황웃는돌씨


지역의 자살예방센터에 도움을 청했다. 심리상담, 애도상담을 받았고 자살유가족 자조모임에도 나갔다. 뒤늦게 아버지의 죽음을 되짚어보게 됐다. 센터 관계자에게 자신같이 센터에 오는 유가족이 몇명이냐고 물었다. 100명도 되지 않았다. 46만 인구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숫자였다.

“자살하는 사람 한명당 주변인이 최소 세명에서 열댓명은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100명도 안 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자살로 가족이나 친구를 떠나보낸 이들이 너무나 많을 거고, 그중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이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없을까 생각했죠.”

만화를 그리기로 했다. 기존의 자살 관련 만화들은 너무 자극적이거나 교과서적인 메시지를 던질 뿐이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자살이 나쁘다’, ‘자살하지 마세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지만, 나도 답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자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얘기가 제일 큰 것 같아요. 용기를 가지고 다 같이 나아가자는 게 방향이죠.”

그는 “스스로 무언가 표출해보는 게 좋은 경험”이라며 “만화를 그리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마음 정리가 많이 됐어요. 그전에는 말하는 게 힘들었어요. 장례식에 오는 분마다 ‘왜, 어쩌다’라고 묻는데 일일이 ‘자살했어요’라고 할 순 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만화를 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 어쩌지, 가족을 욕되게 하면 어쩌지 고민도 했죠. 이 만화가 개개인이 자신의 용기를 꺼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자기도 밝아 보였던 사람인데 사실 가족이 자살했다고 밝히는 분들도 계세요.”

<나는 자살생존자입니다> 21화에는 아버지가 떠난 뒤 아버지 친구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 친구는 눈물을 보이며 말한다. “웃는돌아, 성공보다 명예보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였더라.”

■당신 잘못이 아니야

최근 곽경희씨(48)는 <남편이 자살했다>는 제목의 책을 냈다. 죽고 싶은 사람, 자신같이 남겨진 사람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썼다. 희망 없는 삶은 없다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알코올중독이었던 남편은 2015년 12월 떠났다. 그날은 두 사람이 이혼하기로 한 하루 전날이자 곽씨의 생일이었다. 곽씨와 4명의 아이가 남았다. ‘네가 좀 참지’, ‘어떻게 했길래’, ‘애는 왜 그렇게 많이 낳았어’ 따위의 말들이 맴돌았다. 남편의 죽음이 내 잘못인 양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살고 있는데 나만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난 건 집단상담을 받으면서부터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아픔을 나눴다. 일어난 사건은 돌이킬 수 없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바꿀 수 있었다. 지난 시간을 재해석하면서 죄책감을 덜어냈다. 바닥을 치던 자존감도 회복해나갔다.

남편을 자살로 잃은 경험을 에세이로 풀어낸 곽경희씨


“우리 모두 남모르는 고통이 있구나, 같이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어난 일에 집중하기보다 오늘에 집중했고요. 내 삶이 한부모가정이고, 애들과 씨름해야 하고, 빚만 늘어난다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잘 살아야지, 뭔가 더 좋은 일을 해볼 수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2018년 9월 책쓰기 교실에 들어갔다. 그는 평소 책 읽는 걸 좋아했다. 남편은 책을 달고 사는 그에게 “읽지만 말고 써봐”라고 말하곤 했다. “너와 나의 어리석은 이야기를 써보자, 이렇게 된 거죠.” 안방문을 잠그고 노트에 말하고 싶은 주제를 휘갈겼다. 그렇게 목차를 짜고 글을 써내려갔다. 남편과의 한장면 한장면을 다시 경험했다. 원망과 고마움, 미안함이 뒤섞였다. 예전에는 술에 취해 들어오던 남편만 보였다면, 이제는 그가 손에 든 찌그러진 케이크가 보인다. 미화가 아닌 애도다. 머릿속의 남편과 화해를 해나갔다. 얼마 전 자녀들에게 출간 사실을 알렸다. “아빠 같은 사람들을 살리고, 엄마같이 불행했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야.”

아이들을 키우느라 이렇다 할 경력을 쌓지도 못했고 여전히 돈에 쪼들린다. 그렇지만 곽씨는 “오늘을 살자”고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은 선택이에요. 빚을 다 갚아야지 행복일까요? 행복해져야 빚을 갚을 수 있어요. 제가 겪어보니까 그게 맞더라고요. 내 안에 풍요가 있어야지 실제로도 풍요로운 삶이 돼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없지만 마음이 편안해요. 지금 당신이 하는 그 생각, 그거 하루만 더 보류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좀 알아보라고요. 인생은 성공이냐, 실패냐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해답도, 변수도 무수히 많아요.”

곽씨 역시 말이든, 글이든 아픔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족의 자살은 슬프고 아픈 일이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떠안은 고통과 슬픔을 말로 표현하고 풀어내야 한다. 그래야 점점 가벼워지고 마침내 떠나보낼 수 있다.”(책 속에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극복하고 10년째 생명의 전화 상담사로 활동하는 박인순씨/ 생명의 전화 제공


■나와요, 만나요

지난해 9월 10일 자살 예방의 날, 보건복지부는 개인 38명과 32개 기관에 표창했다. 생명의전화에서 상담사로 활동하는 박인순씨(66)는 그중 한명이었다. 2009년 8월 하나뿐인 아들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밥 한술 뜨기 어려웠다. 온몸으로 슬픔을 겪었다. 아들의 1주기 즈음 생명의전화에서 진행하는 유가족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2011년부터 자살유가족을 돕는 상담사로 활동했다. 자살유가족 출신 상담사 1호로 어느덧 10년차다. 그간 다양한 매체와 자살 관련 행사 등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나 자신이 희망의 메시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자살이 남의 일, 먼 나라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막상 내 삶에 이런 일이 쏙 들어오니까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정신적 붕괴를 경험한 거죠. 도저히 혼자 감당하기 힘든 비참함, 참담함이에요. 다른 유가족들을 만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내가 회복되고 나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다른 누군가가 나 같은 아픔을 겪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죠.”

하지만 도움을 청해 지원을 받는 자살생존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고통을 속으로만 삭이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그는 자살생존자 지원 체계가 더 단단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예전보다 자살유가족 상담 창구나 모임이 많이 생겼다는 건 감사한 일이죠. 프로그램들은 많지만 내가 필요할 때 바로 찾을 수 있는, 상시 운영되는 곳은 없어요. 언제든 지지를 얻고 위로받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곳이 생기는 게 지금 저의 바람입니다.”

황웃는돌씨와 곽경희씨 모두 관련 기관에 도움을 청했다가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 황씨는 올해 심리상담비를 지원받게 됐는데 얼마 안 가 끊겼다. 코로나19로 예산이 줄면서다. 황씨는 “빨리 전문가를 만나서 적절한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와라, 말하라.” 세상 밖으로 나온 자살생존자들의 조언이다. 박씨는 상담사로서의 말도 건넸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누군가 따스한 말 한마디 해준다면 오늘을 또 살아내고 내일도 살아갈 원동력이 됩니다. 그냥 나 괜찮다 하지 말고 힘들다고 표현해도 돼요. 그리고 힘들다는 이에게, 또는 스스로 ‘그래 잘 살아왔어.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라고 다독여주고요. 한단계 더 나아가 문화나 정책적으로도 소망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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