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전태일은 누구인가

한겨레 2020. 11. 21. 11: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⑲ 민주시민교육은 자기보호부터
게티이미지뱅크

“갑작스러운 0교시 지시에 무척 당황스럽습니다. 당사자인 학생과 교사들이 함께 결정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몇해 전 한 고등학교 재직 시절, 신학기부터 고3 수업 전 한시간의 자율학습 시간이 진행될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고 놀라 교장실을 찾았다. “학부모 대표님들이 원해서 하는 일인데 학생과 교사들에게 물었다가 반대하면 어쩌라는 건가요?” “참여할 당사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강제로 동원하는 것보다 묻고 나서 서로의 요구를 절충해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학부모님들의 태도가 강경하니 선생님이 직접 나서서 대화를 해보세요.”

교장의 요구대로 내신성적 1~2등급을 다투는 성적 우수 학생들의 어머니로 구성된 10여명의 학부형들과 만났다. “어머니, 우리 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야간에도 학원과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한시간 앞당겨 등교시키는 것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학교 내신이 1~2등급이라 해도 수능을 잘 보지 못하면 상위권 대학 진학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것저것 다 따지고 어떻게 대학에 가나요?” “1년 내내 수면 부족을 겪으며 체력 관리가 안되면 오히려 불리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파행적으로 증가한 학교 일정으로 몸이 약하거나 공부 동기가 적은 많은 아이가 부적응하는 상황에 놓이고 있고요.” “여기 모인 어머니들의 자녀는 대학 입학에 대한 목표의식이 뚜렷해서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희망하는 아이들과 교사로 자율학습반을 구성해서 운영하면 어떨까요?” “선택적으로 이루어지면 의지가 약해지기 쉽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등교해야만 당연한 일로 여겨 능률이 오를 것입니다.” “사실 고3 교실 반 이상의 아이들이 여덟시간의 정규 수업만으로도 괴로움을 느끼며 근근이 버티는 실정입니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고충은 외면하고 공부 안 하는 아이들 편만 드시는군요. 우수한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아시나요?” “네, 어머니.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시험 불안으로 잠 못 드는 아이, 잠을 쫓으려 각성제가 든 음료수를 자주 마셔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아이, 공부를 해도 해도 자신이 못나 보인다며 수시로 우울감을 호소하는 아이, 모두 상위권 아이들입니다. 과연 강제로 붙잡아두는 공부시간 확보로 이 아이들의 고통이 줄어들까요? 무엇 때문에 상위권 대학 진학을 위해 애쓰고 계신가요? 아이들이 사회에서 존중받고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신가요? 그런데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명문대 입시라는 족쇄에 채워져서, 성적이 저조한 아이들은 학교생활을 통해 반복되는 실패감으로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고 있어서, 스스로의 건강과 휴식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연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어머니들께서 원하는 당당한 사회인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학교의 일방적 결정에 불복하여 의견을 내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민주시민으로 기르기 위함입니다.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저마다의 형편에 맞게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갈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인 교사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노예가 어찌 주인을 기를 수 있겠습니까? 상위권 대학을 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서도 과로로 치명적인 질병을 얻거나 사망하는 일이 허다한 사회입니다. 부디 건강한 민주시민을 기르는 교사들이 될 수 있도록 의사결정권을 존중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들의 표정은 숙연했다. ‘현대사회의 노예는 누구인가’라는 논술시험 질문에, ‘현대사회의 노예는 나다. 명문대 입학을 바라는 부모의 욕망에 의해 하루 열두시간이 넘는 공부 노동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아이의 글로 가슴이 미어졌다. 소년공 전태일은 밤낮없이 미싱대에 앉아 일하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몸을 불살랐고, 서울대를 졸업해 유명 방송사에 입사한 이한빛 피디는 카메라 뒤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살인적 노동실태를 고발하며 세상을 등졌다. 오늘의 아이들은 열두시간이 넘게 책상머리 공부에 시달리며 주인의식을 거세당한 죽은 시민으로 자라고 있다. 얼마나 많은 전태일이 죽어야 바뀔 것인가. 오늘의 전태일은 누구인가? 통렬히 묻고 싶다.

교사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