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으로 돌아가는 산후조리원, 치맥 즐기는 팩트폭격기 떴다

민경원 2020. 11. 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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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의 심스틸러]
맞는 말만 던지는 미혼모 이루다 역 최리
엄지원·박하선 등 선배들 사이서 존재감
한국무용 전공, 데뷔작 '귀향' 진한 여운
선과 악 공존하는 얼굴로 기대되는 신예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 미혼모 이루다 역을 맡은 배우 최리. [사진 tvN]

“제 이름은 이루다예요. 아시면서.”
별다를 것 없는 대사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곳이 산후조리원이기 때문이다. 내 이름이 뭔지, 내 나이가 몇 살인지, 내 직업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오직 아이의 태명과 성별, 출산경험 여부, 어느 병원 출신인지만을 묻는 세상. 쌍둥이 24개월 직수 완모(완전 모유 수유)로 모성이 입증된 ‘사랑이 엄마’(박하선) 같은 사람들은 일등칸에 탑승해 추앙받지만, 초산이거나 젖이 없거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정보가 없거나 워킹맘이면 꼬리칸에서 허덕이는 곳. tvN 월화드라마 ‘산후조리원’은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그 기묘한 세계를 낱낱이 풀어놓는다. 바깥세상과 전혀 다른 질서로 움직이는 세상은 산후조리원에 첫발을 디딘 산모들에게 당혹감을 안긴다.

극 중 25살 미혼모로 등장하는 이루다(최리)는 유일하게 그 질서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요미 엄마’라는 호칭 대신 ‘이루다’라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요구하고, 속옷쇼핑몰 CEO라는 직업병을 발휘해 산모들의 잘못된 브래지어 사이즈를 바로 잡는다. 바깥세상에서 열린 여성경제인포럼에서 우러러봤던 대기업 최연소 상무 오현진(엄지원)도 ‘최고령 산모’ ‘딱풀이 엄마’ 등 자신을 둘러싼 수식어에 갇혀 하지 못한 일들을 태연하게 해낸다. 출산 후 모든 의사결정의 중심이 아이에게 옮겨가는 대신 자기 정체성을 단단히 지킨 결과다. 덕분에 이루다 역을 맡은 배우 최리(25)도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밀리지 않고 존재감을 발휘한다.

똑같은 조리원복을 입은 산모들 사이에서 단연 튀는 스타일링을 선보인다. [사진 tvN]
최연소 산모 이루다의 말에 종종 설득되는 최고령 산모 오현진(엄지원). [사진 tvN]

그가 던지는 질문들도 파문을 일으킨다. 모유 수유를 권장하는 산후조리원에서 하루 일정은 모두 ‘젖’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삼시 세끼 미역국을 먹는 것도, 가슴 마사지를 받는 것도, 운동하고 낮잠을 자는 것도 모두 수유와 유축을 위함이다. 하지만 이루다는 처음부터 ‘완분’(완전 분유 수유)을 선언하고 미역국이 싱겁다며 라면 스프를 넣는 것도 모자라 배달음식으로 맥주에 치킨을 즐기는 등 자유로운 조리원 생활을 즐긴다. “스트레스 받은 엄마의 모유가 과연 아이에게 더 좋을까”라는 논리다. 남자친구의 엄마이자 모유 맹신자인 산후조리원 원장(장혜진)의 눈에는 더더욱 못마땅할 수밖에. 원장 생활 20년 만에 만난 천적 앞에서 두 사람은 톰과 제리 같은 앙숙 케미를 선보인다.

하지만 최리는 이를 당차면서도 사랑스럽게 소화하며 “정상적이고 정상적이지 않은 기준”을 묻는 데 성공한다. “엄마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모성애 또한 차츰차츰 만들어지는 것임을, “여자만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이가 생겼다고 자신의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그에게 아이가 생겼다고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는 통념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는 더욱 다양한 선택지가 등장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듯 육아에도 수천, 수만 가지의 방법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영화 ‘귀향’에서 씻김굿을 하는 모습. [사진 와우픽쳐스]
드라마 ‘도깨비’에서 지은탁(김고은) 사촌언니 역을 맡은 모습. [사진 tvN]

최리가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당연한 선택에 반기를 든 결과다.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한 그는 대학에 진학해 교수가 되는 것을 꿈꿨지만 조정래 감독을 만나 영화 ‘귀향’(2016)에 합류하게 되면서 연기로 전향하게 됐다. 입시 준비를 이유로 한 차례 거절했지만 중앙대 한국무용학과 진학 후에도 영화의 잔상이 남아 함께 하게 됐다고. 타향에서 죽어가는 소녀들을 위해 귀향굿을 하는 은경의 모습은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진한 여운을 남겼다. 정식으로 연기를 배우는 대신 나눔의 집에 방문해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제작이 지연되는 동안 더 단단하게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심지가 굳어진 덕분이다.

역할이나 분량에 대한 편견 없이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강점이다. 주연으로 영화 데뷔 이후 드라마 ‘도깨비’(2016~2017)에서는 지은탁(김고은)을 괴롭히는 사촌언니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2018)에서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진태(박정민)를 편견 없이 대하는 아이돌 가수 지망생으로 분했다. 당연히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벗어나니 운신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진 셈이다. 지금 같은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가야금을 전공한 이하늬, 한국무용을 전공한 한예리처럼 연기와 본업을 병행하는 팔방미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과 “사연이 있어 보이는 눈빛” 때문에 캐스팅하게 됐다는 조정래 감독의 말은 두고두고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될 테니 말이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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