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택일의 법적 판단이 대화와 타협의 의사결정 과정을 압도하다 [전희상의 런던 책갈피]

전희상 경제학 박사 2020. 11. 2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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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사법

[경향신문]

조너선 섬프션
<시험대에 오른 국가>

영국 대법관을 지낸 조너선 섬프션(Jonathan Sumption)은 2019년 BBC 리스(Reith) 강연에서 정치와 사법의 관계를 다루었고 강연록을 소폭 보완해 <시험대에 오른 국가>(Trials of the State)를 출간했다.

우선 섬프션은 현대사회에서 사적 의사결정 범위가 축소되고 그 빈자리를 공적 의사결정이 메꾸어왔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을 주로 가족이 결정했다면, 이제는 의사결정에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고 필요한 경우 법원이 개입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공적 의사결정을 놓고 보면 전통적으로 대화와 타협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프로세스의 대상이었던 문제들이 양자택일의 법적 판단을 통해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치의 사법화’라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여러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법률 제정이나 개정과 같은 의회의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낙태금지법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통해 낙태가 합법화되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유럽인권재판소가 재소자의 투표를 불허하는 영국 선거법이 국제법 지위를 갖는 유럽인권조약에 위배된다고 판결해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회가 다수결로 통과시킨 신행정수도 이전 법안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폐기된 바 있다. 전교조의 합법성이나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배상 청구와 같은 난제들도 정치적 해결이 더뎌 법원이 일종의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물론 섬프션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한남용 해소라는 사법부의 중요한 책무를 부정하지 않는다. 법관이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오직 사실과 증거에 입각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는 미국 대법원의 사례를 들어 이러한 견해를 반박한다. 위에서 언급한 미국의 낙태 합법화는 수정헌법 14조의 적법절차 규정이 개인의 사생활과 자율을 보호한다는 해석에 입각한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20세기 초 동일한 규정이 자유계약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100여개의 노동권 관련 법률을 폐기처분하기도 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법률 해석도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특히 경제적·사회적·도덕적 문제를 다룰 때 법관이 개인적 소신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섬프션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의사결정은 사실과 증거에 입각한 기술적 결정으로, 따라서 법률적 결정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역사와 전통 같은 다양한 문화적 요인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이유로 그는 영국도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처럼 성문헌법을 제정해 사회적·경제적·도덕적 기본권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반대한다. 기본권 보장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그 해석을 법원에만 맡겨 놓을 수 없으며 기본권이 헌법의 보호를 받아야만 유지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미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했으리라는 것이다.

섬프션은 기본권의 실질적 보장은 정당한 민주적 절차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헌법은 보호해야 할 가치와 권리가 아니라 보호해야 할 가치와 권리를 선택하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희상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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