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한방 첩약
[경향신문]
한의원에 들어서면 으레 만나는 물건이 있다. 한쪽 벽면을 채운 노란색 약장(藥欌)이 그것이다. 작은 서랍이 빽빽이 들어찬 약장에는 감초, 산사, 육계, 천마, 지황, 정향, 목과, 문동과 같은 한약재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다. 옛날 한의사들은 약장의 한약재를 꺼내 탕약을 달였다. 약탕기가 있는 가정에서는 한의사가 조제한 첩약(貼藥)을 직접 달여 복용했다. 그러나 요즘 가정은 물론 한의원에서도 첩약을 달이는 광경을 보기 어렵다. 첩약 탕전을 대부분 전문 탕전실이나 한약국에서 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전통 의학의 주된 치료법은 침, 뜸, 그리고 약물이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침구편’에서 침과 뜸의 치료법을 소개했고, 약물 처방은 별도의 ‘탕액편’에서 다뤘다. 한의학에서 약은 ‘본초’라고 부른다. <본초강목>처럼 ‘본초’가 들어간 책은 모두 약학서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한약을 다루면서 ‘본초’ 대신 ‘탕액’이란 말을 썼다. 약초뿐 아니라 탕전을 통한 임상 정보까지 제공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30년 전만 해도 한의원의 주 치료법은 첩약 처방이었다. 노약자들은 겨울이 되면 한의원을 찾아 보약을 지었다. 1980년대 후반 건강보험제가 도입되면서 한의원 치료는 첩약에서 침·뜸으로 바뀌었다. 첩약은 건보 적용에서 제외된 반면 급여 혜택을 받는 침·뜸은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첩약의 급여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정부가 20일 한의원 9000곳을 대상으로 ‘첩약 건강보험 적용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안면신경 마비나 월경통, 뇌혈관질환 후유증 환자가 첩약 처방을 받을 경우 급여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보험이 적용되면 첩약 비용은 기존의 5분의 1로 낮아진다. 침, 뜸, 부항, 추나요법 등 한방 치료법이 이미 보험 적용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첩약 급여화는 상당히 늦었다. 의사협회 등이 건보 재정 지출과 첩약의 효능을 문제 삼아 반대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 건강에 필요하다면 한방이라고 꺼릴 이유는 없다. 첩약 건보 적용은 한의학이 치료의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다. 정부와 한의학계는 한방 과학화 노력과 함께 첩약 급여를 확대해야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sid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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