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민주주의 훼손자
2000년 미국 대선 때 연방 대법원이 내린 플로리다주 수개표 중단 판결을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훌륭한 유산을 손상한 판결.” 당시 플로리다주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대선 당락이 결정될 상황이었습니다. 개표 결과 부시는 고어보다 0.1%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재검표에 들어갔고 부시가 327표 차로 이겼습니다. 고어 측이 소송을 냈고 주(州) 대법원은 수개표를 하라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연방 대법원은 5대4로 수개표를 중지시키는 판결을 내려 부시 측이 승리의 팡파르를 울립니다.
이 판결이 미국 사법 정의의 유산을 손상했다고 주장하는 측은 정치 문제에 사법부가 개입한 걸 그 이유로 꼽습니다. 주 법원의 판단에 맡겨야 하는데 연방 대법원이 끼어들면서 사법 소극주의라는 철학을 훼손했다는 주장이죠. 미국 사법제도는 주 법원 하급심을 거친 뒤 주 대법원 판결이 연방 헌법과 연관됐다는 판단이 서야 연방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판결 이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승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패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법관이 법의 지배를 지키는 공명정대한 수호자라는 미국인의 자신감이 무너졌다”(김영란, 『판결과 정의』).
설령 그의 소송 공세가 성공해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간다 한들 2000년의 재현은 없을 겁니다. 미국 연방 대법관들, 특히 보수 성향의 판사들은 당시를 교훈 삼아 사법 소극주의의 원칙을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처음부터 생각을 잘못했고,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그의 몽니는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오점으로 기록될 겁니다.
사법부가 정치가 할 일을 떠맡으면 정치적으로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사법부는 오욕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오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성의 모습은 뚜렷했습니다. 법관은 공명정대한 법의 수호자라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사법부는 어떤 모습일까요. 사법부의 정치화라는 그림자는 여전히 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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