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공원의 의자 / 배정한

한겨레 2020. 11. 20.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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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고독한 겨울을 나려면 화려한 가을을 마음속에 저장해야 한다.

파리의 도시 문화를 대변하는 공간적 상징, 뤽상부르 공원은 의자 공원의 원조다.

내 마음대로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의자는 의외로 공원에도 많지 않다.

의자 몇 개면 도시의 곳곳을 공원처럼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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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공원의 의자는 도시의 여유다. 노들섬 ©배정한

도시의 고독한 겨울을 나려면 화려한 가을을 마음속에 저장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을을 가로질러 공원을 걷는 것. 걷기는 시간을 우아하게 잃는 일이다. 걷다 보면 계절이 거침없이 그 속살을 열어 보이지만, 걷는 사람은 계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노들섬을 걸었다. 노들섬 산책은 어느 계절에나 소박한 일탈을, 자발적 표류를 허락한다. 강바람 맞으며 섬 하단 둔치길을 걸으면 갈라진 시멘트 틈새에서 자란 야생초가 낯선 산책자를 환대한다. 한강철교와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이 눈앞에 펼쳐지는 넓고 거친 풀밭, 가을을 떠나보내기 아쉬운 사람들이 갖가지 자세로 앉아 있다. 하나같이 캠핑용 의자를 챙겨왔다. 아찔한 물가에, 삐죽한 미루나무 곁에, 풍성한 버드나무 그늘에 늘어놓은 의자에 몸을 맡기고 그들은 스스로 공원을 완성한다.

공원의 의자는 걷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머물게 한다. 의자에 기대앉으면 숨을 고를 수 있다. 느긋하게 다음 걸음을 준비할 수 있다.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고, 기온의 변화를 살갗으로 느낄 수 있다. 빈 벤치에는 오후 한때를 보내고 막 떠난 연인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어느 고독한 산책자의 체온이 남은 자리가 새 주인을 맞는다.

의자가 다시 살려낸 공원, 뉴욕 브라이언트 공원 ©주신하

의자가 다시 살려낸 공원이 있다. 초고층 건물에 둘러싸인 뉴욕 맨해튼의 작은 땅, 브라이언트 공원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뉴요커 누구도 이 공원을 찾지 않았다. 마약과 매춘으로 악명 높던 이 공원은 1990년대 초 변신에 성공한다. 브라이언트 공원을 언제나 북적이는 명소로 부활시킨 동력 중 하나는 의자였다. 쉽게 들어 옮길 수 있도록 가볍고 날렵하게 디자인한 초록색 철제의자가 공원을 살려냈다. 하루 종일 활력이 넘친다. 3천개의 의자가 주변 직장인, 도서관 이용자, 외로운 노인, 가난한 연인, 고단한 여행객에 의해 이리저리 옮겨지며 그들만의 좁지만 소중한 자리가 된다.

파리의 도시 문화를 대변하는 공간적 상징, 뤽상부르 공원은 의자 공원의 원조다. 브라이언트 공원은 ‘뉴욕의 뤽상부르 공원’이라 하기도 한다. 브라이언트 공원의 이동식 의자와 같은 페르몹 브랜드의 녹색 의자 2천개가 공원에 흩어져 있다. 뤽상부르 공원에는 이미 18세기 초부터 이동식 의자가 놓였다고 한다. 약간의 사용료를 받는 의자 임대업이 번성한 적도 있다고 한다. 1990년부터 쓰인 지금의 초록 알루미늄 의자는 이제 파리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무 그늘이든 잔디밭 한복판이든 분수대 옆이든,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의자를 들고 가 나만의 온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도시를 걷다 마음 편히 앉아본 적이 있는가. 화려한 가로뿐만 아니라 레트로 열풍 속에서 뜨고 있는 그 많은 ‘핫플’ 골목길 어디에도 눈치 안 보고 잠시 머무를 내 자리가 없다. 카페에 아메리카노 한 잔 값 내지 않는 한,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라도 사지 않는 한, 우리 도시에는 나를 반기는 빈 의자가 없다. 내 마음대로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의자는 의외로 공원에도 많지 않다. 자기 의자를 가져가지 않는 한, 걷기를 멈추고 숨을 돌릴 수 있는, 쪽잠을 즐길 수 있는, 일상의 노을을 즐길 수 있는 내 자리가 공원에조차 없다.

앉을 곳 많은 도시가 걷기에도 좋은 도시다. 걷기는 도시에 자유를 주고, 앉기는 여유를 준다. 편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좋은 도시의 필요조건이라면, 여유롭게 앉아 쉴 수 있는 공원은 충분조건이다. 의자가 공원을 살릴 수 있다. 의자 몇 개면 도시의 곳곳을 공원처럼 쓸 수 있다.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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